네줄 冊

우리의 피는 얇아서 - 박은영 시집

마루안 2022. 4. 13. 21:22

 

 

 

울림 있는 시집이란 이런 거구나 했다. 새로운 시집 전문 출판사가 되려나. 시인의일요일에서 연달아 좋은 시집을 만난다. 기분 좋은 일이다.

 

집이 신촌이라 지척에 있는 안산과 인왕산을 자주 오른다. 보통 인왕산에 올라 안산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대부분이다. 내려오는 마지막 지점이 보통 봉원사다. 

 

봉원사 입구에는 엄청나게 큰 백목련이 있다. 목련이 꽃은 예쁘나 진 꽃이 조금 흉하다. 수북히 쌓인 목련잎이 시커멓게 변해가고 있다. 목련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있는데 종소리가 들린다.

 

해거름에 듣는 범종 소리는 처음인 것 같다. 이렇게 사찰의 종소리가 아름다울 수 있구나 했다. 종을 치는 시간이 길기도 했다. 재보지 않았지만 10분은 족히 넘게 쳤을까.

 

노을을 바라보며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울림 있는 종소리에 오래 귀 기울였다. 이 시집이 그렇다. 첫 시부터 마음을 붙잡더니 긴 울림 때문에 후기를 쓰기 않고는 못 배기게 한다.

 

이런 시집 읽을 때가 행복하다. 철부지 같은 소리로 들을지 모르나 50평짜리 30억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 없는 자의 자유가 이런 것인가.

 

거기까지 안 가더라도 2년이든 4년이든 이사 걱정할 일이 없어서 행복하다. 집값이 떨어질까 아니면 집세 오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더 행복하다.

 

주식이나 비트코인 오르내림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더욱 행복하다. 평생 복권 사본 일이 없으니 로또 같은 복권 꽝이 나와 실망하지 않아도 되니 더더욱 행복하다.

 

오늘의 운세도 요행도 믿지 않지만 이런 시집을 만난 행운에는 감사하다. 좋은 시인 하나를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모쪼록 시인의 건필을 빈다.

 

 

즉석복권 - 박은영

 

가능성은 긁지 않을 때 일어나는 사건

 

우리는 서로의 등을 긁어 줬다 꽝인지, 행운인지 손 닿지 않는 곳을 긁어 주는 사이가 되었지만 잔소리를 하며 바가지를 긁을 때가 많았다 긁을수록 앞날은 보이지 않고 마른 등판만 눈에 들어왔다 일확천금의 불가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가장 쉬운 일

 

긁지 않고 그대로 두는 편이 나을 뻔했다 우리는 꽝이란 것을 안 뒤 즉석요리를 먹듯 뭐든지 쉽게 화를 내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찢어지자며 인성을 높였다 어떤 날은 긁다가 혈흔을 남기기도 했다

 

손톱은 피를 먹고 자랐다 우리의 관계에서 남은 건 피밖에 없다는 생각을 할 때, 등골은 물론이고 이마와 미간, 손등,,,,, 온몸은 그야말로 손톱자국으로 이글거렸다

 

그래도 한 가지

 

우리가 낳은 자식은 가능성이 많은 아이라고 여겼다

 

그 희망을 간직하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