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괜찮지 않은 봄날 저녁 - 김명기

마루안 2022. 4. 5. 21:41

 

 

괜찮지 않은 봄날 저녁 - 김명기

 

 

봄비 오는 줄 모르고 잤다

내리는지 몰랐던 비처럼 쏟아지는 잠

 

누군가 몸 한 귀퉁이를

잘라냈다는 말을 듣는데 온몸이 얼마나 아프던지

비명은 내 몫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읽던 책을 펼쳐 놓고 노트북도 켜 둔 채

시간 모를 잠에서 깨어 뒤척이다

그녀에게서 사라졌다는

몸 한쪽으로 다시 돌아누웠다

 

수화기 너머 정비사가

낡은 찻값의 반이나 되는

수리비 견적을 말하며 깨끗하게 수리하면

괜찮을 거라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며칠째 떠돌이 개가 집 주위를 맴돌며

눈치를 살피지만 괜찮지 않은 마음으로

모르는 척 피하고 있다

비 내리는 봄은 괜찮지 않은 것투성인데

괜찮다는 말을 입 속에서 혀처럼 달고 산다

 

한쪽을 잘라낸 몸과

찻값의 절반이나 되는 수리비와

굶주린 채 떠도는 버림받은 개가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나

그렇게 괜찮지 않은 봄날 저녁이 왔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사람

 

 

 

 

 

 

강변여관 - 김명기


이른 봄 먼 여관에 몸을 부렸다
움트지 못한 나뭇가지가
지난겨울 날갯죽지처럼 웅크린 저녁
피는 꽃 위로 어둠이 포개지고
흐르는 물결 속으로 달빛이 스민다
모든 게 한 번에 일어나는 일 같지만
오랜 생을 나눠 가진 지분들이 서로 허물을
가만히 덮어준다 경계를 지우며 살 섞는 시간
낯선 세상에 와 있다는 건
욕망의 한 부분을 드러내
무던히 참았던 육신을 들어내는 일
시시해 보이는 창가 의자에 앉아
허물을 격려하지 못해 멀어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잊어버린 주문처럼 쓸쓸한 이름
가끔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는
측은한 저녁이 올 테지
허물 대신 온기 없는 낡은 침대와
살을 섞으며 시든 불화의 목록에서
견디지 못해 그어 버린 경계를
그렇게나마 지워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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