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쓸쓸한 채집 - 윤향기

마루안 2022. 4. 6. 22:40

 

 

쓸쓸한 채집 - 윤향기

 

 

나비를 수집하러

팔라우, 페낭, 마다가스카르에 온 적 있다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열대로 치장한 나비들이

비린내가 날 때가 있듯이, 모든 나비들이

번개의 엽록소를 탁본하지는 않는다

날개 달린 뱀들이 떼 지어 지나는 곳에서

곧잘 목이 메는 황금색을 채록하는 것은

누군가 흘리고 갔을 눈물 하나 줍는 일이다

누군가 흘리고 갔을 이름 하나 줍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비가 꽃잎을 박차고 장자의 산맥을 넘어갈 때

날개를 먹이와 바꾼 어떤 떨림은

살아서는 발굴되지 못할 이름 모를 계곡에 뒤태를 묻고

가슴을 문질러 젓대를 불던 어떤 춤사위는

살아서는 발굴되지 못할 늪지에 앞태를 묻는다

 

천 년 전

별이 쓸린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아

이 세상에 와서도 바오밥나무 몇 잎은 가늘게 흐느꼈다

 

 

*시집/ 순록 썰매를 탄 북극 여행자/ 천년의시작

 

 

 

 

 

 

천화도(遷化圖)* - 윤향기


동안거를 끝냈는가
한 벌 옷이 외출을 하네
저당 잡힌 묵언수행과 가압류된 묵은 소유
한 덩이 달 반죽 속에 훌훌 날려 버린다

소몰이 창법으로 쏟아 내는 들숨 날숨은
팔천 가닥 자비 면발을 실실이 뽑아낸 것
늪보다 어두운 숲길을 허기지게 걸어가네
귀를 끌어당기는
꿀벌색 날갯짓의 처음과 끝 그 사잇길로
네발 달린 짐승이 되어 마침내 기어가서
몇 과 사리로 영근 들꽃 같은 세속의 말
담담히 베고 누워 나뭇잎 경전을 덮는다

어디쯤인가
빙하기 살찐 보름 한 입 베어 물고 잠이 들면
바깥을 닫은 거기서부터 벌써
묽다

 


*천이화멸(遷移化滅): 깊은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쓰러져 나뭇잎을 긁어 덮는 고승의 죽음 의식.

 

 

 

 

*시인의 말

 

누구도 말했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그 모든 순간

시의 정원을 둘러본다.

 

16년 만이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음에 쓰빠~시바!

다시 만난 들꽃들에 쓰빠~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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