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김애리샤

마루안 2022. 4. 2. 21:17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김애리샤

 

 

이장인 아빠가 마이크를 잡으면 난정리엔

주황색 난초꽃 향기가 공지사항처럼 번졌다

선거철엔 아빠가 전송하는 하얀 봉투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부자가 되었고

죽산포 술집에서 아빠의 딴따라는

깊은 밤 잠든 파도까지도 깨워 춤추게 했다

 

아빠가 지금 누워서 볼 수 있는 세상은 천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천장 가득 태어나는 꽃송이와

춤추는 파도를 바라보는 일

 

아빠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항문에서 찌그러진 달덩이가 굴러 나왔다

파내도 파내도 계속 나오는 달덩이

아빠는 점점 가늘어졌다

 

아빠 속을 다 파먹은 벌레들이 살이 올라

달덩이 흉내를 내며 아무렇게나 빛났다

가난도 아빠를 파먹고 무성하게 자랐었는데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일수록 부지런히 자란다

 

아빠가 헝겊 인형이라면 배를 가르고

가증스런 빛들로 가득 찬 아빠의 장기들을

과일칼로 세심하게 도려내고 싶었다

그 속엔 우리의 시간이 얼마나 들어 있을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생 아빠에게 달라 붙어 있던 허울 좋은 친절들과

가족들에게만 엄격했던 회초리들과 엿 같았던 고집들을

파내는 일, 아빠 똥구멍에서 병든 달덩이를 채굴하는 일

한때 생명의 기원이었을 아빠의 쭈글쭈글한 고환 아래가

축축하지 않도록 새삼스럽게 잘 닦아 주는 일

 

아빠는 하루에 여덟 번씩 기저귀를 갈았다

아빠가 가벼워질수록 내가 무거워져서 행복했다

 

 

*시집/ 치마의 원주율/ 걷는사람

 

 

 

 

 

 

바람의 형태 - 김애리샤

 

 

당신은

바람이 불면 생겨나는 사람

 

저쪽 끝에서 불어와 다시 저쪽 끝으로 사라지는

바람의 간격은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만큼의 거리

 

움직이는 모든 것들 속엔 바람의 기척이 있다

지금 막 짙어지기 시작한 나뭇잎들을 만지며 지나간

바람의 잔향이 맴도는 여기에서, 당신은

없는 모양으로 무질서하게 나타난다

 

내가 믿기만 하면 어디에나 생겨나는 당신

은밀하게 불어대는 바람 속에서 나는 당신을

한 편의 시로 읽어내고 싶다

당신의 기척이 나와 부딪치는 순간의 형태를

우리만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다

 

당신은 바람이 불면 생겨나 나를 깨우는 사람

내 속에서 돌아다니는 바람의 향 때문에

심장은 초록 가득한 나뭇잎들처럼 기쁘게 부풀어 있다

 

내가 흔들리는 그곳엔 언제나 당신이 있다

 

 

 

 

*시인의 말

 

누군가와 같이 부르던 노래를

혼자 불러야 할 때가 온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준

엄마, 아빠

당신들과 같이 부르던 노래를

혼자 부를 수밖에 없는 지금

 

나는 만질 수 없는 당신들의

지나간 시간을 뜯어 먹으며

당신들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나는 나 때문에 고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