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휘파람새 울고 동백꽃 지니 - 안태현

마루안 2022. 3. 26. 21:12

 

 

휘파람새 울고 동백꽃 지니 - 안태현

 

 

모처럼 홀로 되어

묵은 때 씻겠다고 뭍에서 섬으로 건너오니

휘파람새가 운다

 

가파른 비탈에 뒹구는

동백꽃 숭어리들

 

섬에서는 나를 오래 보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싸구려 옷을 좋아하고

허술한 민박집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이

내 생의 농도

너무 묽은 게 거슬리고

너무 끈적이는 게 두렵기는 하지만

 

술집에서

바다에서

점집에서

나사 한 개가 풀린 것처럼 낭비가 필요한 내 감정들

 

꽃 질 때 우는 새도 있는데

너무 우는 일을 잊고 살았다는 것인가

등 돌리고 가서는

밥 한 공기처럼 웃는 일이 많았다는 것인가

 

나를 태운 이 섬이 둥둥 떠서

망망대해로 흘러가면

홀로 우는 휘파람새가 되어도 좋겠다

 

파도에 밀리고 밀리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이 되어

끝내 시처럼 살아내도 좋겠다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탁발 - 안태현
-루앙프라방


꽃 피는 일만 생각하다
꽃 진 자리
흔한 한 끼도 없이 홀로 건너가야 하는 강
매어둔 배는 없고

돌아보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나와 당신들

가령 다 보여줄 수 없는 강가의
희고 검은 날씨 같은

해를 넘길 때마다
새로 지은 밥처럼 따뜻한 영혼이란 말을 좋아했지만
뻔뻔하고 뻣뻣하고 빡빡한
씀씀이가
내 침몰의 원인

그러니까 더 엎드려보라는

붉은 가사를 입은 꽃들이 문턱을 넘어서 마당을 지나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까지 배웅할 때가 있다

이게 생시인사 꿈인가 싶어서
가진 모든 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면
아무것도 지불할 수 없는
눈물과 열매들

내가 이것을 알고 있는 게 가장 무섭다

 

 

 

 

# 안태현 시인은 전남 함평 출생으로 201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달의 신간>,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