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와 함께 사는 것의 목록 - 이기철

마루안 2022. 3. 21. 21:43

 

 

나와 함께 사는 것의 목록 - 이기철

 

 

비애야,

나의 종잇장 같은 슬픔을 아느냐

 

멀리서 놀러 온 구름, 바람이 데리고 온 가랑잎, 쉬어 가라 해도 서둘러 떠나는 햇빛,

칠 벗겨진 녹색 대문, 엽서를 기다리느라 몸이 닳은 우체통

 

너무 쉬이 입 다무는 나팔꽃, 핏방울로 피는 샐비어

도꼬마리, 키다리, 꿩의비름, 물봉선화, 도라지, 구절초, 메밀꽃, 이질풀

 

너무 정직해서 슬픈 것들아

네 이름을 부르는 백로지 같은 나의 비애를 아느냐

 

끼니에야 찾는 둥근 사발, 낮아서 편한 쟁반, 몸이 하얀 연잎 접시, 빛바랜 마호가니 탁자, 짝 잃은 보시기, 성급한 전기밥솥, 불평 많은 식칼, 잎 푸른 상추, 보라색 가지,

참매미의 이별 노래를 들으며 묵은 책상에서 시의 언어를 빌려 쓰는 이름들

 

비애야,

내 기다림의 긴 끈을 너는 아느냐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세상을 건너는 바람 - 이기철

 

 

저녁이 오면 푸른 노동의 하루가 팔을 내린다

신발에 하루를 담고 걸어온 이웃들이 지붕 아래로 돌아가면

물을 것이 많은 아이처럼 지붕마다 별이 돋는다

벨벳 어둠이 풀꽃들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

하늘을 만지던 지붕이 처마 쪽으로 키를 낮춘다

언제 필까를 묻는 꽃들이 잠시 얼굴을 숙이고

이름 부르면 금세 대답할 사람들이

머리맡에 내일이라는 약속들 두고 등불 아래로 돌아간다

내게 온 하루들은 이제 작별에 익숙하다

내 눈 맞춘 꽃들이 어둠에 묻히면

걸어온 발자국들엔 하루의 체온만 남는다

산은 오늘밤도 키가 클 것이고

신장의 신발들은 지나온 길을 벗어 놓고

세상을 건너는 법을 어둠에게 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