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름의 행로 - 복효근

마루안 2022. 3. 19. 21:26

 

 

구름의 행로 - 복효근


어제는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왔으므로
구름은 동쪽으로 흘러갔다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구름은 흘러갔다 

아침녘엔 어치가 와서 놀다 갔는데
오후엔 물까치가 왔다 갔다 

다시 새를 기다리는데
가까운 선배 모친 부음이 왔다
잠히 후엔 거리조차 먼 선배 모친의 부음이 왔다 

둘 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먼 쪽을 택해 조문을 갔다 

빈소에 아는 조문객도 없고 해서
슬그머니 나와 바닷가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아닌 쪽에서 부음이 오기도 하고
없는 쪽에서 구름이 오기도 한다 

내가 가는 날
아주 먼 후배가 조문을 왔다가
가까운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고 갈지도 모를 일 

내일은 박새가 몇 마리 놀러 올지도 모른다
혹은 아무것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집/ 예를 들어 무당거미/ 현대시학사

 

 

 

 

 

 

장례식장 엘리베이터엔 거울이 없었으면 좋겠다 - 복효근

 

 

친구가 죽었다

저녁밥 때에 맞추어 조문을 갔다

서두르지 않았다

 

돼지고기 편육을 새우젓에 찍는데

새우 그 작은 눈이 떠다녔다

 

밥맛이 좋았지만 차마

한 그릇 더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비애가 비계처럼 씹혔다

 

친구가 아니고 친구 아내가 죽었다면

몇 시간 더 머무르다가 아니

발인까지 지켰을지 모른다

 

화장실 가는 척 일어서면서도

무료주차권에 스탬프 찍는 걸 챙기는데

영정 속의 친구가 웃는다

 

삭지 않은 새우젓 새우눈깔 같은

말줄임표 몇 개가 허공을 떠다녔다

 

장례식장 엘리베이터엔 거울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

 

 

 

 

# 복효근 시인은 1962년 전북 남원 출생으로 전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따뜻한 외면>, <꽃 아닌 것 없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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