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흘째 가는 비가 와서 - 심재휘

마루안 2022. 3. 8. 22:18

 

 

사흘째 가는 비가 와서 - 심재휘

-런던

 

 

사흘째 가는 비가 와서 굴뚝 연기들도 지붕을 타고 흘러 내렸다 보건소의 얼굴 짙은 의사는 웅얼거리는 표정을 겨우 만들었다 골목까지 내려앉은 하늘 불지 않는 바람 젖기만 하는 나무의 날들, 지빠귀는 한번 더 운다

 

런던은 비닐로 오래 덮어둔 반죽 같고 저 멀리 빌딩 옥상에서 비 맞으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까마득하지가 않고 비에 웅크린 지붕들처럼 걷는 소리만 가득한 거리 그외에는 신기한 것도 궁금한 것도 없이 비가 온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조차 모두 한통속이 되어 버스를 기다린다 오른쪽을 바라본다

 

얼굴이 뭉개지도록 사흘째 가는 비가 와서 얼굴에서 흘러 내린 자그마한 얼을 손에 받아 들고 걸음은 멀리 가야 한다 반죽을 아무렇게나 뜯어도 수제비가 되던 그런 생애를 다시 한번 가져볼 수 없다면 쓸쓸하도록 표정을 감춘, 이 비의 나라를 힘껏 껴안을 수밖에 없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가로등 아래 - 심재휘

-런던

 

 

가로등이 밤에 구걸한 빛을 남겨놓은 듯

불 꺼진 낮에는 전짓불 같은 여인이

담요로 무릎을 덮고 앉은

가로등 아래

 

가로등 아래로의 시선은

어둠 속의 불빛밖에 없는 듯해도

아침이 오면 집을 나서는 이들에게

종이컵을 내밀어보는 가로등 아래

고개를 떨구어 빈 컵에서 보게 되는

몇푼의 빛 희미하다가 가물거리는

 

얼마나 많은 가로등이

밤마다 불을 켜고 아침을 불렀을까

밤새 가로등 불빛이 쓸고 닦은 가로등 아래

지도에는 없는 쓸쓸한 망명 나는

그녀의 이민이 한푼 더 봄볕 쪽이기를 바라지만

거저 오는 아침은 없고

이 추운 봄 그녀의 지난밤이

노숙이 아니었기를 구걸하듯 지나칠 뿐

 

 

 

 

*시인의 말

 

잠들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의 역사는 내일의 것이지만 나는 아직 잠들지 않은 나의 것이고 내가 뱉은 시들은 시집의 것이라고. 그러면 창밖의 저 하현은 누구의 것입니까? 모로 누워서 한쪽 어깨가 아픈 사람의 것입니까? 우리의 것입니까? 아직은 시가 되기 전의 그저 하현일 뿐입니다. 조금 더 서쪽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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