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실수 같은 봄이 찾아와 - 김애리샤

마루안 2022. 3. 7. 19:32

 

 

실수 같은 봄이 찾아와 - 김애리샤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열었는데

초승달이 가느다랗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밤

적적한 공기 휘저으며 심호흡 한번 했는데

당신 냄새 섞여 있어 눈물 났던 밤

꼭 당신이 아니어도 알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애써 결심했던 밤

 

문득문득 실수로 채워져 빛났던 그때들

 

나의 향기를 예쁘게 말려 간직하겠다던

당신의 노래들은 뒤척일수록 멀어지고

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볼품없어지고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순간들

그렇고 그런 순간들처럼

딱딱한 공기로만 채워지던 우리 사이

만질 수 없는 꿈들이 계속되는 새벽

불면증처럼 울던 나의 표정들

차라리 더 아픈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

실수를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환했던 그때

세상 모든 밤들엔 출구가 없을지도 몰라요

 

당신과 나의 관계가 모두 진실일 수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요

때론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마음이 되고 싶어요

 

실수 같은 봄이 나에게로 왔어요

 

 

*시집/ 치마의 원주율/ 걷는사람

 

 

 

 

 

 

외포리 여인숙 - 김애리샤


구정을 막 지낸 외포리 선착장 앞바다
멀미하듯 눈보라가 어지럽게 날리면
교동 죽산포로 가는 천마2호는
다음 날 아침까지 얼어 버린 바다에 갇혀
섬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외포리 여인숙 일 층 큰 방에 모여들어
떼꾼한 눈 어릉어릉 달래며
화투 점을 치기 시작하는 사람들
내일 아침에는 배가 뜨려나
모란이 그려진 화투장을 애써 찾아내
아빠 무릎 베고 누운 열 살 소녀

아빠가 화투장을 내리칠 때마다
들썩거리는 밤바다처럼 잠들지 못한다
가까스로 일어나 창문을 열면
엄마 냄새  같은 갯벌 냄새
얼음에 눌린 파도 소리가 
소녀의 속눈썹 위로 내려앉는다

두께를 알 수 없는 소리로
쩡쩡 몸살을 앓던 바다 위 얼음들
밤새 구겨지던
겨울 밤하늘의 별자리들

내일은 배가 뜰 거야
밤새 얼음을 뒤집으며 들썩이는 파도 소리
눈보라가 외포리 여인숙으로 몰려들고

 

 

 

 

# 김애리샤 시인은 강화도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다. 시집으로 <히라이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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