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같은 봄이 찾아와 - 김애리샤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열었는데
초승달이 가느다랗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밤
적적한 공기 휘저으며 심호흡 한번 했는데
당신 냄새 섞여 있어 눈물 났던 밤
꼭 당신이 아니어도 알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애써 결심했던 밤
문득문득 실수로 채워져 빛났던 그때들
나의 향기를 예쁘게 말려 간직하겠다던
당신의 노래들은 뒤척일수록 멀어지고
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볼품없어지고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순간들
그렇고 그런 순간들처럼
딱딱한 공기로만 채워지던 우리 사이
만질 수 없는 꿈들이 계속되는 새벽
불면증처럼 울던 나의 표정들
차라리 더 아픈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
실수를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환했던 그때
세상 모든 밤들엔 출구가 없을지도 몰라요
당신과 나의 관계가 모두 진실일 수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요
때론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마음이 되고 싶어요
실수 같은 봄이 나에게로 왔어요
*시집/ 치마의 원주율/ 걷는사람
외포리 여인숙 - 김애리샤
구정을 막 지낸 외포리 선착장 앞바다
멀미하듯 눈보라가 어지럽게 날리면
교동 죽산포로 가는 천마2호는
다음 날 아침까지 얼어 버린 바다에 갇혀
섬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외포리 여인숙 일 층 큰 방에 모여들어
떼꾼한 눈 어릉어릉 달래며
화투 점을 치기 시작하는 사람들
내일 아침에는 배가 뜨려나
모란이 그려진 화투장을 애써 찾아내
아빠 무릎 베고 누운 열 살 소녀
아빠가 화투장을 내리칠 때마다
들썩거리는 밤바다처럼 잠들지 못한다
가까스로 일어나 창문을 열면
엄마 냄새 같은 갯벌 냄새
얼음에 눌린 파도 소리가
소녀의 속눈썹 위로 내려앉는다
두께를 알 수 없는 소리로
쩡쩡 몸살을 앓던 바다 위 얼음들
밤새 구겨지던
겨울 밤하늘의 별자리들
내일은 배가 뜰 거야
밤새 얼음을 뒤집으며 들썩이는 파도 소리
눈보라가 외포리 여인숙으로 몰려들고
# 김애리샤 시인은 강화도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다. 시집으로 <히라이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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