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떤 순간 - 최규환

마루안 2022. 3. 5. 21:29

 

 

어떤 순간 - 최규환

 

 

마음에 몰아치는 날엔 자주 눈에 충혈이 온다

 

한순간도 존재였던 적이 없다는 생각과

무엇이 되거나

혹은 무엇으로 남아야 되는지가 분명하지 않아

바람 드는 곳에 물든 붉은 목단처럼

 

나와 만나고 헤어졌던 십수 년의 세월에 관한 영상이 드나들었던

그 길었던 시간이 스친 건 몇 초에 불과하다

충혈이 지속되는 것에 맞춰 허공에 오르는 일처럼

아득함이,

말할 수 없는 의미심장이 들어차는 듯하다

 

그때보다는 달라진 모습으로 인생은 와 있었고

가늠할 수 없는 방향을 향해 있겠다는 다짐도 하지만

 

위태로움이었거나

멀리를 향한 마음을 붉게 쳐들고 둥둥 떠다닐 때

소리 밖을 떠나지 못하는

짐승의 울음 하나가 있었다

 

 

*시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문학의전당

 

 

 

 

 

 

신경통 - 최규환

 

 

깨밭 옆집에 살던 여자는 땅주인이 해먹으라며

던져준 깨밭에 재미를 붙였다

주인이 심어놓은 체리나무 옆

이불 몇 개 펼쳐놓은 크기의 땅

비가 잦아 밭고랑에 물이 들어찬 날엔

손톱만 한 볕을 짓이겨 조금씩 물들여주었다

깻잎이 무성해지기 전까지

서러운 깨의 눈들이 고름을 거둬들였다

 

질긴 팔자였다

술병으로 남편은 세상 등을 졌고

큰아들놈은 사투리가 심한 여자와 살면서

바다가 보이는 기슭에서 편지를 보내온다 했다

신혼엔 깨가 쏟아졌으나

마디가 꺾이는 관절엔

우기(雨期)에 젖은 밭고랑을 닮아 하관(下棺)처럼 골이 파여 있을 무렵

목련이 피기도 전에

웃자란 깨를 하나씩 여미어갔을 때

구름이 끌어주는 황망한 길에서도 허리를 풀지 않았다

 

등불과 맞닿아 그림이 펼쳐지는 순간에도

신경통을 앓는 깨 향기가 주름처럼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