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의 막다른 골목에서 - 류흔

마루안 2022. 3. 3. 19:47

 

 

봄의 막다른 골목에서 - 류흔

 

 

열이 오른다, 봄이 오는 게지

 

막다른 곳은 언제나 골목이다

화가 난 개에게 쫓겨 그곳으로 달리다가

문득 생각났다 나는 열이 오르고

개는 지난계절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급진적으로 권태가 왔다

무엇을 해야 하나

저 혐오스러운 개 대신 졸음이

나를 안락사시킬 것 같았다

안락안락 눈꺼풀이 덮치기 전에

 

서가에 꽂힌 세계문학을 일별했다

개츠비는 여전히 위대했고

앨리스와 함께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가 세 가지 질문을 했으며

베르테르는 늙어서도 슬펐다

자기만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나는 골목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저놈의 개!

동물농장을 읽었는지 지나치게 술을 마시지 않는 개

부릅뜬 채 졸음을 감시하는 개

 

열이 오른다, 역시 봄이 오는 게지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달아실

 

 

 

 

 

 

봄이 오면 - 류흔

 

 

그다지 세게 살지는 않았으나

살아보니

가장 후회하는 것은 나였다

나는 상냥하지 못했고

손을 얹은 양심에게도 떳떳하지 않았다

여러 처녀,

 

그중에 돋을새김 같은 첫사랑에게 그랬고

젖던 노를 부러 놓아버리고

오래 호수 위에 떠있던 오리배가 그렇고

아들을 잃어버린 여인을 토닥이며 흠

흠 그녀 머리카락을 맡은 것도

그러나 대부분은 영리해서 나를 떠나간 아가씨들

 

이제 나는 가정에 익숙해졌으니

부디 잊기를!

 

지금 눈앞을 지나는 미풍이

그대들 치맛자락 같아 간지럽다

전도유망한 계절이 늙은 고목 아래 앉아있는

한 사내를 허술히 지나쳐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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