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덫 - 최백규

마루안 2022. 2. 22. 21:46

 

 

덫 - 최백규


밤새 덫에 뭉개져 있던 쥐를 끄집어낸다 손끝에 밴 피비린내가 지워지지 않는다 바람도 죽은 대낮에

커튼을 젖히다 돌아봐도 아무도 없다 암세포만 몸속에서 꾸준히 자라고 있다

빨래를 하고
밥을 차린다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두렵지 않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평생 하청 업체에서 일했다 자존심을 죽이지 못해 늘 순탄치 못했다 용접 불꽃과 부딪치며 살아온 그들은 잘못 접합된 쇠처럼 어긋나 있었다

이제는 잘린 손가락이 약속을 쉽게 꺾어버릴 것 같다던 농담마저 우스워진다

팔에 새긴 이름을 긁적일 때마다 몸에서 고기 타는 냄새가 난다 욕실에서 혼자 등을 밀다 문득 이 계절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거리 나무들도 병을 앓아 꽃에서 고름을 흘릴 것이다

피 흐르는 손목을 쥔 채

덫처럼
아무리 끊으려 해도 질긴 게 있다 말하던 눈빛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유체 - 최백규

 

 

흙물이 들듯 짓무르다 일어나면 채 마르지도 못한 화초가 된 것 같았다

 

창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에 신중히 움직이는 선풍기 날개 뒤

요양병원 지하 장례식장처럼

네가 있었다

 

내가 돌아가더라도

더는 말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곳이었다

 

계산원의 인사법으로 웃다가

유원지 돌담에 기대앉은 외판원의 석양이기도 하고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어 종점까지 닿는 기분으로

새로 배운 미신을 외우거나

식사도 거르고 주머니 속 잔돈처럼 구겨져 중계방송을 보며 속으로 소리쳤다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독거가 길어지면

세간에 발끝을 치이거나 마음 따위를 헐어야 하는 일들도 잦아지는 법이라서

 

가스 밸브와 커튼 아래 켜켜이 쌓여가는 그늘만

바라보다가

 

사람들이 우리가 온전히 떠났다 믿을 때까지 호흡을 참았다

 

보낸 적 없는 이의 명복을 비는 일은 무덤에 대신 누워주는 것보다 싫었지만

 

튼 입술을 적시며

또 살아야 했다

 

어제 자른 손톱이 휴지 위에 그대로 있다 볕이 좋아 죽어본 적 있다는 듯

정갈히 신을 정리했다

 

 

 

 

# 최백규 시인은 1992년 대구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4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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