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양폭산장 바람 소리 - 김기섭

마루안 2022. 2. 23. 21:58

 

 

양폭산장 바람 소리 - 김기섭

 

 

물빛 고운 비선대를 떠나 천불(千佛)이 거처한다는 천불동으로 접어들었다. 귀면암을 지나 양폭산장에 도착할 무렵 대청에 낙엽이 다 졌다는 풍문이 들려왔고, 산장 앞 단풍잎들은 눈물겹게 빛났다.

 

만경대 꼭대기, 새벽부터 비가 뿌렸다. 공친 산행, 어두운 산방에 일없이 둘러앉아 소슬바람에 삐걱거리던 문소리와 떨어지는 단풍잎을 바라보면서 아침부터 술을 마셨다. 낮이 되면서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정현 형이 가수 장사익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별처럼 슬픈 찔레꽃 향기는 골짜기를 떠돌다가 가을비에 젖어 들고 밤새 바람이 세찼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밖을 나서는데 그새 가을이 다 갔는지 지천으로 깔린 붉은 잎을 차마 밟기 어려웠다.

 

 

*시집/ 달빛 등반/ 솔출판사

 

 

 

 

 

 

꿈꾸는 수렴동 - 김기섭

 

 

사랑하는 사람이여.

수렴동에 가거든 편지를 써주세요.

거기 가면

핏물 문지르듯 번져가는 단풍나무 숲과

백담계곡 물빛 넘어

아름드리 전나무 옆

살아서 수렴동 전설이 된 사내의

너와집이 보일 거예요.

 

옥녀봉 꼭대기 보름달이 자욱한 날

골짜기를 바라보세요.

무작정 떨어지는 달빛 조각들이 흩어져

참나무 잎들이 눈부실 겁니다.

또 거기에는 몇 겁 세월 건너온 빗살무늬 너울 따라

부서지고 단절된 단상들이

대승담에 고였다 흐를 것이고

그대, 고요가 밀려드는 여울에 앉아

날마다 수렴동이 꿈꾸는 소리를

바람결에 묻어오는 오세암의 목탁 소리를

그믐달이 스쳐간 용아장성 이야기를

숨죽여 듣다가

혹시 귀가 멀지는 않았는지요.

 

사랑하는 이여.

제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낼 때는

그대 사랑의

가야동 붉은 단풍잎으로 우표를 붙이시고

할 말이 더 있거든

달빛을 밟고 간 바람의

백담사 풍경 소리를 동봉해주세요.

마지막으로 눈감아도 떠오르는 가야동의

눈이 시린 물 빛깔만

고운 눈에 담아오세요.

 

 

 

 

# 김기섭 시인은 1962년 강원도 화천 출생으로 경원대를 졸업했다. 열여덟 살에 암벽 등반을 시작해 국내 23개의 암릉길과 암벽등반 코스를 개척했다. 2006년 인수봉 등반 중 추락 사고로 지체장애1급 판정을 받았다. <달빛 등반>이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장이 뛰던 시절 - 정덕재  (0) 2022.02.26
저물도록 - 박수서  (0) 2022.02.26
덫 - 최백규  (0) 2022.02.22
불운의 달인 - 이현승  (0) 2022.02.22
견뎌야 희망이다 - 박지영  (0) 2022.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