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운의 달인 - 이현승

마루안 2022. 2. 22. 21:32

 

 

불운의 달인 - 이현승


나는 무례한 사람들의 특징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부끄러움이 많고 사무적이며
세상에는 뭔가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
어떤 급한 일도 덜 중요한 일로 만드는 능력을
신은 왜 그들에게 주었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늑장 피우지 않지만 서두르지도 않는데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월이 짧은 것이 달력 기술자의 문제가 아니듯
마음을 급하게 먹는다고 해가 빨리 가는 것도 아니며
슬슬 얼굴색이 삭힌 홍어처럼 되어가는 사람 앞에서라면
그들은 한 호흡으로 더 멀리 잠수하는 사람처럼 굴지만

다음 기회란 항상 꽝 뒤에 오는 것이라서
운 나쁜 사람은 철로에서 튄 돌멩이에 눈을 맞은 사람이며
벼랑 말고는 다음이 없어 참기 힘든 사람이다.
우리는 성공이 약속한 대로 찾아오지는 않아도
파산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불운한 사람들에게 모자란 것은 인내심이며
참으로 다급한 쪽은 언제나 불운한 사람들이겠지만
예의 없는 사람에게 예의바름이란 또다른 무례라서
불운의 달인들은 무식과 고성이 달변보다 빠르다는 것을 안다.
신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자각 증상 - 이현승

 

 

가장 뼈아픈 후회는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것

이 년 전에 혹은 사년 전에 혹은 그보다도 더 전에

그들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샀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지.

그게 후회의 내용이 될 수 있을까?

혹자는 말하지.

할 수 있었지만 안 한 것, 그게 바로 못한 것이다.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또 몰랐지.

따뜻한 말 한 마디, 악수라도 건넬걸,도 아니고

집을 안 산 것, 아니 못 산 것

그런 게 정말 후회가 될 수 있을까?

그땐 그래도 집이, 끌어모을 영혼처럼 손에 잡힐 것 같았는데

지금은 집도 없고, 영혼은 도대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뿌연 미세먼지와 스모그 사이로

좋아했던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어느 날 툭 통증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죽을 만큼 아픈 건 아니지만

내내 신경이 쓰이고 거슬리고 괴로운,

약도 없고 원인도 모르는 해괴한 병 아닌 병들,

통증으로만 존재하는 병들은 일종의 경고 같다.

꼼짝없이 서서 뒤돌아보게 만드는 경고.

그래서 생각해본다.

집을 사는 것보다 골몰했던 영혼을 쏟아부었던 일들.

할 수 있었지만 하지 못한 것, 그건 안 한 것이기도 했다.

아직 사십대인데, 오십견이라니.

어깨가 아프니 손이 올라가지 않고

아픈 어깨를 주무르다 생각하니

그때 손이라도 잡아줄걸 지금은 없는 사람을 두고

제 손이나 주무르고 앉아 있다.

 

 

 

 

# 이현승 시인은 1973년 전남 광양 출생으로 원광대 국문과,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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