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 심재휘

마루안 2022. 2. 17. 22:30

 

 

 

심재휘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을 냈다. 그는 1997년에 등단했고 햇수로 25년이다. 그동안 다섯 권을 냈으니 5년에 한 권 꼴이라 비교적 과작인 셈이다. 하긴 10년 만에 시집을 내는 사람도 많으니 이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네 번째 시집에서 홀딱 빠졌었기에 다음 시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4년 만에 나와 반가웠다. 시집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은 걷고 있는 나를 또 걷게 할 수는 없지>, <런던은 외로움부 장관이 임명되는 당신의 나라>,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다.

 

이전의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으로 2019년 제1회 김종철문학상을 수상했던 시인은 이후 런던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인 그는 연구년을 맞아 한동안 런던에 체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시집은 런던에 관한 시가 여럿 실려 눈길을 끈다. 나는 2002년 12월 21일에 떠나서 2017년 5월 25일까지 15년을 런던에 살았다. 그 기간에 여러 번 한국을 다녀가긴 했어도 관광이 아닌 밥벌이를 위해 머문 곳이라 런던에 관한 시가 유독 달리 읽힌다.

 

심재휘 시의 특징이기도 하거니와 이 시집에도 쓸쓸함이 가득하다. 서울은 먹고 살기 위한 고단함으로 쓸쓸하다. 런던은 먼 곳인 줄 알고 왔는데 와서 보니 떠난 곳이 다시 먼 곳이 되어 쓸쓸하다. 강릉은 시인의 탯자리여서 아련한 추억 때문에 쓸쓸하다.

 

온통 쓸쓸함이 밴 싯구는 삼월의 꽃샘추위처럼 시리게 다가 온다. 꽃샘 추위 지나면 꽃이 피듯 그 먼 곳에 깃든 쓸쓸함을 낯설게 대면할 수 있을까. 그의 시는 행간에 담겨 있는 여백마저 쓸쓸하다.

 

 

#서울

 

*그러니까 상처란 모름지기 흉터란

찢어지고 짓물러도 그깟 사연쯤이야 하던 시절의 것

어린 시절에 모은 흠집들이 몸에 터를 잡고 산다

피를 흘리며 소리치면

놀라서 뛰어오던 가련한 어머니의 집

 

*시/ 흉터/ 일부

 

 

*두고 온 햇살들아 그리운 어둠들아 모두 데리고 올 수 없어서 거기인 것들아 너무 늦지 않도록 나의 인사는 고마웠다고

 

*시/ 옛집/ 끝 부문

 

 

*울음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구부정한 저녁은

당신에게 왜 추억이 되지 않나

오늘은 짙은 노을이 당신의 발을 감싸는 하루

 

*시/ 신발 모양 어둠/ 일부

 

 

#런던

 

*수선화가 지고 목련이 피었는데 말해줄 사람이 없다 라디에이터에 걸린 수건에서 묻어 있던 얼굴들이 마른다

 

*시/ 이을 수 없는 길/ 부문

 

 

*나의 먼 곳을 누설하지는 않았다

그의 먼 곳을 묻지도 않았다

 

*시/ 저 많은 플라타너스 잎들/ 일부

 

 

시집은 서울과 런던을 거쳐 고향인 강릉에 닿는다. 도로 사정과 교통편이 열악했던 예전에는 고향도 하루 종일 가야만 닿을 수 있던 곳이었다. 강릉도 한나절은 가야 도착했다. 갈수록 고향이란 애틋함이 퇴색하는 이유다. 시인은 고향을 쓸쓸하게 회상한다.

 

 

*이제 낡고 지저분해진 나의 쓸쓸함은 방랑을 탕진하고 갈 데도 없어졌지만 남대천 모래톱 그 따뜻한 돌집으로 돌아가 함께 살 수는 없을 거예요 가는 비조차 피할 도리가 없는 정처란 그런 거예요 내가 돌볼 수밖에 없는 그저 쓸쓸한 쓸쓸함이 된 거죠 서울은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시/ 쓸쓸함과의 우정/ 일부

 

 

시집 제목을 여기서 따 온 시로 고향에 대한 추억이 온전히 담겨 있다. 문장에서 묻어나는 절절함과 애틋함이 저절로 쓸쓸한 감상에 젖어들게 한다. 시인의 심성을 알 수 있는 시가 있어 옮긴다. 오래 곁에 두고 읽을 만한 시집이다.

 

 

행복 - 심재휘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은 날도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