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 류흔 시집

마루안 2022. 2. 15. 19:12

 

 

 

출판사 서평과 해설을 보면 이 시집을 읽은 당신에게 경배와 존경을,, 어쩌고 나오는데 나는 경배까지 받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두꺼운 시집이 나왔어? 하는 탄성 정도랄까. 실제 시집 마지막 페이지 숫자가 548이다.

 

다섯 권 정도의 시집을 한꺼번에 묶었다고 보면 된다. 실제 세 보지는 않았으나 시집 해설에서 322편의 시가 실렸다고 한다. 보통 시집 한 권에 60편 내외의 시가 실리고 값도 1만원 안짝인데 이 시집은 1만 3천 원이니 실린 시편에 비해 저렴하게 읽었다는 위안 정도랄까.

 

나같은 쫌팽이 독자는 이 고귀한 문학 작품에 책값을 결부시킨다. 어쨌거나 나는 몇 년 전에 읽은 첫 시집부터 이 시인에게 관심이 있었다. 비교적 시적 호흡이 고르고 자기 만의 개성이 담긴 시가 인상적이었다.

 

류흔은 흔히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기 위한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시집을 내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때 시를 읽으면서 이 사람 언젠가는 활짝 필 날이 있을 거야 했는데 이렇게 무지막지한 두께의 시집으로 두 번째 행차를 할 줄은 몰랐다.

 

두께로만 보면 시집이라는 관념을 완전히 깼다. 내 생각엔 차라리 다섯 권 정도 나눠서 (아니면 세 권) 한두 달 간격으로 발행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독자 입장이다. 가뜩이나 시가 안 읽히는 시절에 두께에 질려 들춰볼 엄두를 못낸 독자가 있을 수 있다.

 

시에 늘 허기가 진 나는 이 두꺼운 시집을 단번에 읽었다. 소설처럼 흥미진진한 것은 아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고 술술 읽혔다. 일단 시를 잘 쓴다. 읽는 동안 한눈 팔지 못하게 하는 긴장감도 있다.

 

자석처럼 딱 문장이 눈에 들러붙으면 잠시 멈추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게 만드는 공감 가는 시가 여럿이다. 아! 이래서 내가 시를 끊지 못하는구나. 시도 일종의 중독이다. 비록 돋보기를 써야 하지만 시에 빠질 수 있는 건강한 눈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100분짜리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 하나와 의미 있는 대사 한 마디만 건져도 본전을 뽑은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 시집은 가성비 완전 갑이다. 거기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찰진 문장이 수두룩하니 맛난 음식에 침이 고이듯 저절로 시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느리고 기인 일생(一生)

 

죽기 직전에야 안다 인생은

짧다는 것을.

 

미래에서 생각하면

몇 가지 추억,

바람의 낱낱에 실린

가벼운 냄새들.

 

지금 생각하니 적(敵)이 있었고

적이 없었다.

 

적이 없었다는 고백은

그런 적(的)이 없다는 의견일 듯,

 

기일고 느린

일생,

 

언젠가는 나의 무덤이 될 게 뻔한

명백한 인생.

 

*시/ 인생/ 전문

 

 

마침표와 쉼표가 적절히 배치된 이 시 한 편이 스펀지에 물 스며들 듯 눈에 온전히 들어 온다. 많고 많은 시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시집에 실린 시의 순서가 그냥 정해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섬세하고 치밀한 배치다. 이 시인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마지막 시는 이렇다.

 

 

내가 쓴 시 - 류흔

 

내가 쓴 시는

대부분 남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육신이 푹 썩어야

잘된 장사(葬事)이듯

 

내가 쓴 시는

한 삼백 년 묵은 두엄이었으면 한다

 

존경하는 독자들이 일동

차렷 두엄에게 경례!

 

정중히 인사하는 날이

까마득 왔으면 한다.

 

 

지인 중에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이 있다. 매일 자기 전에 성경 몇 구절을 암송한다고 했다. 예전에 야유회 갔을 때 배낭에 든 성경책을 보고 참 대단하구나 했다. 내게는 이 시집이 성경책이 될 듯하다. 두께로도 내용으로도 내 詩心을 깊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