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눈망울의 배후 - 복효근

마루안 2022. 2. 5. 19:29

 

 

그 눈망울의 배후 - 복효근


가난한 이웃나라 어느 빈촌에 갔을 때
진열대에 싸구려 과자만 잔뜩 쌓여있는
허름한 가게  하나 있었다

헐벗은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이 애처러워
몇 푼씩 주려 하자
안내를 맡은 이가 돈을 주는 대신 가게에서 과자를 사서
한 봉지씩 쥐어주라고 했다

과자 한 봉지씩 쥐어주고
쓰러져가는 집들을 돌아보고 골목을 벗어나려는데
아이들 손에 들렸던 과자는 다시 거두어져
진열대에 놓이는 것을 보았다

내가 준 것이 독이었을까 약이었을까
내가 지은 것이 복이었을까 죄였을까

어느 하늘보다 별이 맑은 그 밤
끝내 묻지 못하였다
아이들의 머루알 같은 그 눈망울의 배후

 

 

*시집/ 예를 들어 무당거미/ 현대시학사

 

 

 

 

 

 

입춘 무렵 - 복효근


혼자 살다가, 버티다가
딸내미, 사위들 몰려와서
가재도구 차에 나누어 싣고
앞집 할머니 콜택시 불러 요양병원으로 떠난다

아프면 아프다 진작 말하지
요 모양 요 꼴 되어서
이웃에서 전화하게 만들었느냐고
노모를 타박하는 딸년도
눈시울 뭉개져 아무 말 없는 노인네도
무던하다 생이 그렇다

겨울 지나는 입춘 바람이 맵다
살던 집 둘러보는 노구의 구부러진 그림자를
휘청 담벼락이 받아준다

거기가 요양하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으랴만
당신도, 나도 우리도 다 안다
대합실 같은 곳, 대기소 같은 곳
그러나 다행이다
더 요양할 삶이 남아 있지 않다

아무튼 나는
손수 가꾸어 가지런히 다듬어서 주시는 부추와
생도라지와 달래나물을 다시는 못 얻어먹겠구나 싶어서
눈앞이 자꾸 흐려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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