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꾸로 읽는 편지 - 최규환

마루안 2022. 1. 22. 21:52

 

 

거꾸로 읽는 편지 - 최규환

 

 

소양호 계곡으로 가는 길

기억의 매듭이 간격을 잃고 말았다

울음보따리 풀어놓듯 넘실대는 산자락들

봄볕이 좋아 망설이던 사이

묵언수행 중이던 먹보 행자의 겨울은 차고 외로웠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던 서울살이였는데

초록이 짙고 다시 겨울이 찾아오던 해

그는 새벽에 핀 고드름처럼 투명한 결을 따라 처소를 옮겼다

 

지워진 숲의 얼굴도 있었다

불 그림 그리는 친구는 청평사 사천왕 옆에서

사문(寺門) 대들보를 물려받은 후

삼십 년 넘어서니 아들 하나 생겼다 했고

계곡의 얼음결을 따라

숨 죽여 읽고 또 읽었던 설경(雪景) 속 편지

 

나는 그해 겨울을 견디지 못해

호젓한 연못에 편지를 띄웠다

 

산사로 가는 첫배

거꾸로 가는 방법을 몰라 젖은 매듭으로 나풀거렸다

 

 

*시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문학의전당

 

 

 

 

 

 

처음과 끝 - 최규환

 

 

당신이 서 있는 저만치에서 눈이 내렸다

 

어느 녘에서 흔들리다가

목적을 둔 뜨거움이었다가

결국이라는 떠올림 같은 것들이

처음과 끝 사이에서 흔들렸다

 

바람의 습기를 안고 떠나는 끝물

어느 순간엔 헐거운 무게로 와서

오솔길 언덕에

따듯한 손등에도 내려앉았더랬는데

 

이번 생엔 다그치는 눈발로 끝나더라도

햇살 드나드는 마당

면목 없는 얼굴로 눈이 내려와 있기를

 

나는 어떤 배경 속에 있었고

창문이 보였던 영하의 벤치엔

파르르 떠는 편지 한 장이

폭풍을 무릅쓴 풍경처럼 아득했다

 

기억이 흐려질 만큼 눈이 쌓인 후

눈의 알갱이를 그러모아

불을 지피는

처음이었다가

흩어지는 마지막 사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