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해당화 피는 마을 - 김용태

마루안 2022. 1. 18. 22:35

 

 

해당화 피는 마을 - 김용태

 

 

그저 술 좀 과하게 마신 기억밖에는

 

파도에 휩쓸려 솟구치다 떨어지기를 수차례

목이 타서 깨어보니

웬 낯선 방에 저 여자하고 내가

벗어 놓은 신발짝처럼 나란히 누워있더라고

짚이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꿈속 일 같기도 하고

 

차려 내온 아침상을 사이에 두고

저나 내나 내세울 것은커녕

그 뿌리조차도 알 수가 없어

감추고 싶은 지난 일들만 들추고 있었는데

힐끔힐끔 훔쳐보는 것이

아주 싫지 않는 눈치더라고

 

그 날 바로 '해당화' 간판부터 내리게 하고

장화 두 벌 장만하여

물이 들면 바다로 가고

물이 나면 뻘에 나가 사십 년을 버텼지

등기만 내 앞으로 안 해 놨다 뿐이지

그 때는 서해바다 전부가 내 것이었어

 

사랑?

아무리 근본 없는 갯것들이라고

저리 붉은 시절이 없었으려고

주렁주렁 대추알 같은 칠남매가

그냥 만들어 졌겠어

 

안 그런가 임자?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황씨(黃氏) 기일(忌日) - 김용태 


황씨가,
붉은 눈에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이장집 마름 황씨가,
젊어서부터 밥보다는 술을 우선해
왼종일 목구멍 뒤로 넘기는 것이라고는 술뿐이었고
한 때는 소마리씩이나 끈 소문난 씨름꾼이었던 그 황씨가
항우 장사보단, 주태백이라는 원치 않을 별호(別號)를 얻어 

강경(江景) 어디 술청에선가 청상과부, 보쌈하듯 데려와
절골(寺谷) 구석진 곳에 제비집같은 움막 짓고
아들 셋 나란히 두고도
진 날, 갠 날 없이 술타령, 장타령뿐이더니
15일 부여 장날, 중들 수로에 막걸리병 꼭 쥔 채

달과 함께 쑤셔 박혀 허망하게 생을 버리게 되었는데
- 그 만한 죽음이면 천하의 주태백이가 이태백이를 만나러 갔으니 서운치는 않을 것이고, 그래도 마음에 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손에 들었던 술이라도 마저 비우고 갔으면 덜 아쉬웠을 것이라는 흰소리를 들으며 죽은 것이 다시 오늘 이라서 

곱슬머리에 팔자걸음까지 제 할아버지 닮은
어린 것 앞세우고 동네 어귀로 들어오는 것이
큰 아들 놈인지, 둘째 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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