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배심원 - 안은숙

마루안 2022. 1. 6. 22:15

 

 

배심원 - 안은숙

 


나는 마흔에 기소되었다. 배심원들은 내 마흔에 대한 죄목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나의 마흔은 죄지은 나이

투덜거림으로 식탁을 차려야 하는 지독한 권태, 그래서 난 낯선 밤을 사랑하기로 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을 켜고 외출에 몇백 명의 애인을 숨겨두고 싶었던 나의 마흔은 낯익은 사람들이 싫어지는 나이, 판결을 운운하던 날 보라색 속옷을 사들였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손톱을 물어뜯고 마흔 개의 꼬리를 단 나는 꼬리가 길어지는 이유를 자꾸 병원에 물었다

온갖 연령대들로 구성되어 있는 배심원들 그들은 내가 지나쳐 온 연령이거나 지나친 연령, 사소한 너는 그때 치마를 입지 말았어야 했어 줄 나간 스타킹을 돌돌 말지 않았어야 했어 종교에 귀의할 시간을 놓쳐버린 거야 의견은 달랐다

나는 공책을 읽었고, 서른에 보내는 투정의 문장들이었다

두 겹 세 겹 매니큐어를 바르고 한밤중에 나가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리카락을 잘랐다 배심원, 그들은 각자 다른 입장이므로 판결하는 내용이 각각 달랐다 과거를 갖고 판결하자는 사람이 있었고, 현재를 갖고 판결하자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어느 의견을 들어도 과반수가 안 되는, 내게는 지루한 재판이었다

 

 

*시집/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 여우난골

 

 

 

 

 

 

터미널 온도 - 안은숙

 

 

터미널의 커피는 왜 항상 한 2도쯤 식어 있을까 왜 서두르는 맛이 날까 권역별 지명들이 왁자하게 섞이는 터미널, 울렁거리는 노선을 지나온 버스에서 내리는 근거리의 피곤한 얼굴이 있다

 

나는 한 2도쯤 식어 있는

터미널의 온도가 좋아

 

선팅된 약국의 멀미약 글자 사이로 내다보는 안경 쓴 약사가 있고 어눌한 발음으로 묻는 검은 얼굴의 사내는 어눌한 설명을 믿지 못하고 빨간 아이들이 허겁지겁 비우고 간 스낵코너엔 빈 접시가 있고 발차하는 지명들이 모여 있다

 

입석의 경유지들이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두리번거리는 시간들이 먼 곳과 인근으로 나뉘는 곳, 지연되지 않는 시간 시동이 걸려 있는 모두의 목적지, 바퀴들의 둥근 공기들은 뜨겁거나 아슬아슬 낡아 있다

 

나는 한 2도쯤 뜨겁거나 서두르는

터미널의 온도가 좋아

 

불지 않은 시간만 있을 것 같은, 몸속의 화기 식히러 가끔 터미널로 가면 한 2도쯤 식혀 돌아오는 터미널의 온도들

 

 

 

 

# 안은숙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건국대 대학원 교육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201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가 첫 시집이다. 2021년 제1회 시산맥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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