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침내 - 천양희

마루안 2022. 1. 3. 21:45

 

 

마침내 - 천양희

 

 

아침 바람은 가로등에 스치고
눈 내리는 날엔 풍경이 풍경을 본뜨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고
매일 실패하며 살기도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젊음은 제멋대로 왔다가 조금씩 물러나고
우리의 찬란이 세상 모르고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마음에도 벽이 있고
생각에도 동굴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닫고 살기보다 열어놓고 살기란
더 강력한 삶이라는 걸 알았을 때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
묻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때

마음에도 야생지대가 있군, 중얼거리며
내가 마침내 할 일은
죽기 살기로 세상을 그리워해보는 것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사소한 한마디 - 천양희

 

 

1920년 뉴욕의
어느 추운 겨울날
가난한 한 노인이 “나는 맹인입니다.”
잭은 팻말을 들고
공원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몇 사람만 동전을 던지고 갈 뿐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때 한 행인이
맹인 앞에 잠시 머물다 떠났다
그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맹인의 적선통에 동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마음을 돌려놓은 것일까
팻말은 다음과 같은 글귀로 바뀌어 있었다 
“봄은 곧 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마음을 크게 벌었던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의 글.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심원 - 안은숙  (0) 2022.01.06
눈오는 들판에서 - 박남원  (0) 2022.01.06
음식에 대한 예의 - 김승강  (0) 2022.01.03
꽃별 지다 - 김남권  (0) 2022.01.03
눈 내리는 충무로 인쇄골목 - 전장석  (0) 202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