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별 지다 - 김남권

마루안 2022. 1. 3. 21:27

 

 

꽃별 지다 - 김남권


한 사내가 죽었다
종각역 4번 출구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보신각 뒷골목에서 가로 육십 센티
세로 백육십 센티 빈 박스 속에서 마른 새우처럼,
최초로 엄마의 바다를 헤엄칠 때처럼,
잔뜩 웅크린 채 굳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그 앞을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를 조문하지 않았다
또 다른 노숙자가 다가와 그의 안부를 물었고
곧이어 구급차가 나타나 그를 싣고 갔다
아무도 울지 않았고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삼십 년 전 종묘광장 벤치 위에서 잠을 청하고
서울역과 청계천 빌딩 숲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던
순간에도, 달방호의 차가운 물길 속을 걸어 들어가던
순간에도 그랬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저물어가도 되는 것일까?
조문도 없는 길 위에서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하고
다시 새벽이 왔다
별 하나가 잠들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시집/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시와에세이

 

 

 

 

 

 

별이 죽었다 - 김남권


한 사람을 가슴에 품는 순간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어머니가 처음 나를 세상에 내보내던 순간
당신의 체온과 맥박으로 안심시키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말없이 안아주었던 것처럼,
누군가를 가슴 한켠에 들여놓으려면
그 사람의 상처까지 내 살갗의
무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숨결은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한 번도 끊어진 적 없는 인연의 들숨과 날숨이
한 사람의 영혼에 깃들고
또다시 지상의 키 작은 꽃송이를 만나
호흡이 완성되는 것이다
우주의 높은 분이 밤마다 별 하나를 내려보낼 때,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온
몸에 뜨거운 숨결이 맥박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외로운 가슴을 열어 한 사람을
죽는 날까지 품는다면 상처로 꽃 피웠던
모든 순간들은 새로운 핏줄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오늘 밤 나는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어둠 속을 지나
허공으로 난 푸른 사다리를 기어 올라 마지막일지도 모를
애달픈 그리움 하나 만지고 돌아올 것이다

 

 


# 김남권 시인은 경기도 가평 출생으로 2015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 <등대지기>, <하늘 가는 길, <불타는 학의 날개>, <빨간 우체통이 너인 까닭은>, <저 홀로 뜨거워지는 모든 것들에게>, <바람 속에 점을 찍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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