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라는 말 - 이현승
우리들의 인내심이 끝난 곳.
사는 게 도대체 왜 이러냐고 묻고 싶은 사람들은 하늘을 본다.
별 볼 일도 없는 삶이라서
별이라도 보는 일이 은전처럼 베풀어지는 거겠지만
사람이란
후회의 편에서 만들어지고
기도의 편에서 완성된다고 할까.
부드럽게 호소해도 악착스러움이 느껴지는.
그 많은 간구의 눈빛과 목소리를
신은 어떻게 다 감당하고 있는 걸까.
콩나물처럼 자라 올라오는 기도들 중에서
제 소원은요 다른 사람 소원 다 들어주고 나서 들어주세요.
하는 물러 빠진 소원도 없지는 않겠지만.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선 곳
그러니까 풍문과 추문을 지나
포기와 기도를 지나
개양귀비 뺨을 어르며 불어오는 바람이
가까운 진흙탕 위로 내려앉는 것을 본다.
아무리 맑은 우물이라도
바닥사정은 비슷하다.
그러므로 함부로 휘젖지 말 것.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플랜 B - 이현승
건물주가 되고 싶은 게 그렇게 잘못인가요?
꿈도 없는 게 더 문제라면서요?
이런 건 꿈도 안 되나요?
인생에는 공짜가 없다거나
실패가 없으면 배우는 것도 없다는 식의
충고라면 사양하고 싶어요.
충고가 고충이에요.
건물주의 인생은 뭐 쉬울 것 같냐고 하시지만
고충 빌딩이어도 좋으니 건물주가 되고 싶어요.
요즘 애들 진짜 문제라지만
진짜 문제를 갖고 싶어요.
내 문제, 나만의 문제, 진짜 진짜 내 문제.
그도 아니면 요즘 애들이라도 되어보고 싶어요.
문젯거리라도 좋으니
우선 존재는 하고 싶어요.
빚 없는 거지 같은 거 말고요.
빚이라도 좋으니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거요.
존재하는 게 뭐냐고요?
간밤에 폭설이 내렸는데
빈 나뭇가지 위에 눈이 높게 쌓여 있었어요.
그토록 가느다란 가지 위에도 높게 눈이 쌓일 수 있다니
# 이현승 시인은 1973년 전남 광양 출생으로 원광대 국문과,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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