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고 또 오는 - 이은심

마루안 2021. 12. 30. 21:33

 

 

오고 또 오는 - 이은심

 

 

우주의 질량은 변함이 없다니 먼지의 총량을 쓰윽 닦아내는 무릎의 수고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울음도 가만 두면 썩을 것인가

번번이 옳은 청소도구와 올바른 물걸레가 첫눈 같은 얼굴로 쓸어내는 오고 또 오는 불화의 장르들

내 지옥도 조금씩 버리면 덜 아팠을지 몰라

 

수박은 씨를 아무 데나 뱉는다

어디서든 불어닥치는 생이 앞치마를 벗어 터는 곤한 저녁에 안주인이란 식후에 창문을 넓게 열고 새 수건을 갈아주는 사람

물로서 물을 씻어 먹는 결벽증은 밖을 묻히고 오는 강아지를 하얗게 빨아 널 텐데

 

시계가 시간을 떨어뜨린 곳

싸리꽃 흰 빛 다투던 곳

헛되고 헛되니

 

나는 발작적인 결백에 전염되었는지도 모르는 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든 훌훌 사라진 다음이란

마음껏 닦아 세운들 꽃바람일 리 없고

오색 찬란에도 손때 반질거리는 내성이 생길 테니

 

말라붙은 곤충과 곰팡이와 파랗게 언 잉크 등등이 온도와 습도와 한 몸 잘 어울려 바야흐로

지금은 세계의 모든 빛들에게 마른행주질을 할 때

 

 

*시집/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상상인

 

 

 

 

 

 

밥줄 - 이은심


찬밥과 더운밥 사이에 잘 끼어들었습니다
뒤를 비우고 앞을 내주고 한 번 지면 끝까지 지는 실업
밥이 없는 공휴일의 배식구에 등록했습니다
초면들끼리 악수를 하면 손바닥에 피가 묻어나
방금 손위와 손아래가 사라졌습니다
내게 너무 무거운 얼굴
노려보기에 적당한 나는 생면부지입니다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의 생을 올라탈 뻔했습니다
어디든 끝이 있다면 새로운 질병을 몸에 처방하고

그곳에서 나를 허기의 자식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도처에 사람이라는 구석을 슬어놓고
밥 앞에 줄을 세우는
깊숙한 이런 훼손
수저질이 남긴 이번 눈물은
식도처럼 꽝꽝 어둡습니다

 

 

 

# 이은심 시인은 대전 출생으로 한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5년 계간 <시와시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오얏나무 아버지>, <바닥의 권력>,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가 있다. 2019년 대전일보문학상, 한남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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