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다 - 홍성식

마루안 2021. 12. 22. 22:08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다 - 홍성식

 

 

부를 이름이 줄어든다는 건 사라질 준비다

 

형도,

남서부 도시의 밤을 장악한 열아홉 어린 깡패

상대 조직의 칼에 찔려 스물이 되지 못했다

문석,

졸업식도 빼먹은 채 상경한 사법고시 준비생

여덟 번의 쓴잔 마시고 느티나무에 목을 맸다

영철,

여자 넷 사이를 오가면서도 들키지 않았던 카사노바

두 살 아기가 죽자 아내는 감잣국에 청산가리를 탔다

명호,

끝끝내 시인이고자 했던 해사한 문학소년

자본가 장부 정리하며 살더니 편지 한 통 없이 실종

 

1989년 낄낄대며 철없이 웃던 흑백사진 속 아이들

호명에도 대답이 없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스위치를 올려줘 - 홍성식

 

 

견디는 생이 지겹다

턴 오프

한 소식 들은 승려의 돈오돈수처럼

나도 뉘도 모르는 사이

심장을 데우던 불이 꺼졌다

이제 발가벗은 여자 앞에서도

반응하지 않는다

뛰지 않는다

피의 순환 속도를 빨리하지 않는다

 

정열의 스위치는 꺼졌는데

미약한 펌프질은 남았으니

불행은 이미 현재진행형

미래는 동요처럼 명확하다

흔해 빠진 프랑스 여자의 누드

감동 없는 발기의 나날

분홍빛 복숭아 닮은 엉덩이 들어 올려

누가,

스위치를 올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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