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변신 이야기 - 김수우

마루안 2021. 12. 20. 21:45

 

 

변신 이야기 - 김수우


남부민동 산복도로 골목
점집 간판이 많다
신을 닮은 먼지들과 먼지를 닮은 신들
천궁으로 갔다가 용궁으로 갔다가 아씨가 되었다가 할매가 되었다가 보살을 부르다가 도깨비를 부르다가
몸을 바꾼다

장롱 밑에서 찬장 속에서 까치발 한
흰 먼지들,
언제 어디서나 부푼다
피란민 꿈속에서 앉은뱅이책상에서 깨금발 뛰던
푸른 먼지들,
마을버스에서 구멍가게에서 오늘도 구르며
집세를 걱정하고 곰팡이를 걱정한다

확, 걸레질로 닦아내도
다시 차곡차곡 내려앉는 저 기도들
걸레로 변신한다
닦아낸 자리마다 맴도는 저 신앙들
비딱한 봉창으로 변신한다

설화신궁 도깨비동자 용왕장군 아씨당 불사대신 천상선녀 작두장군 백궁거사 천궁도인 천상대감 이화보살 할매당 약명도사 애기설녀

흩어지며 뭉쳐지며
옹기종기 모여 앉는 탯줄의 이름들
부러진 젓가락 같은 질문이 된다
오늘도 살아 있냐고

 

 

*시집/ 뿌리주의자/ 창비

 

 

 

 

 

 

근대화슈퍼 - 김수우

 

 

천마산 밑 초장동 '근대화슈퍼'가 부산항을 펼치고 있다

근대화, 슈퍼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1950년대 점방 그대로다

소주도 팔고 담배도 팔고 감귤도 판다

식용유, 비누, 북어와 번개탄이 거미줄을 치고 기다린다

 

가난이 이끼 많은 바위처럼 고집 센 가축

희망과 예언은 근대화될 수 없다

거기서 팔리는 것들은 언제나 초월

 

파란의 역사를 기르는 산동네

늙은 몸집마다 홍역처럼 아직도 부적(符籍)이 피어난다

슬픔은 화석이 되지 않는 것처럼

그림자는 숨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천마산도 동백꽃도 근대화되긴 글러먹었다

 

과자 든 네살배기 팔랑팔랑 나비가 되고

막걸리를 사 든 팔순 노인 꾸물꾸물 애벌레가 된다

때 묻은 차양 위에서 미끄러지는 저녁 햇빛의 발

고장난 계량기를 딛고

 

아득바득 벼랑에 매달린 근대화슈퍼, 형광등을 켠다

푸득푸득 다친 비둘기처럼

 

 

 

 

# 김수우 시인은 1959년 부산 출생으로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길의 길>,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몰락경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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