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이라는 내용을 가진 한때 - 강재남

마루안 2021. 12. 16. 22:11

 

 

슬픔이라는 내용을 가진 한때 - 강재남


단단하고 헐거운 감정이다 일시에 터지는 빛이라는 거다

태양이 쓴 문장을 읽는다 흰 그림자를 가만히 본다는 거다

누군가 그리워하기 좋을 때다 골목 너머로 시간이 진다는 거다

울음 닮은 침묵이 골목에 박제된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과 약속을 한다는 거다

빛이 빛으로 환원되는 순간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익숙해지는 것들에 마음을 내려놓고

단단하고 헐거운 감정을 말린다 그림자의 휴식처를 궁금해 말아야 한다는 거다

가장 낮고 초라한 곳이어도 그래 그럴 때도 있지 담담해진다는 거다

훌쩍 자란 계절의 뼈를 만진다 제 색으로 눈물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거다

수선화 라일락이 지고 봉숭아 씨앗이 여문다 사람이 사람으로 되돌아온다는 거다

 

 

*시집/ 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 달을쏘다

 

 

 

 

 

 

내가 나를 무엇이라 부르지 못하고 - 강재남


어쩌면 네 가는 길을 너보다 먼저 디뎠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은 잠시 머물다 너머로 갈 뿐이었다
바람의 귀퉁이에 내 이름 적어 부치고
가을은 아무렇지 않게 가을이어서 서러웠다
나뭇잎 붉어갈 때 네 모습이 저만치 멀어졌다
그것을 보고도 살아남아
잎과 잎 사이 가을바람을 맞는다
내가 나를 알아보는 것이 무거워
오늘은 몇 발짝만 움직이고
구름 한 송이 따서 배경으로 걸었다
오랜 슬픔이 다른 슬픔을 쓸어안으며
붉나무 잎사귀처럼 나는 울었다
세상이 소리 없이 젖고 있었다
야위어가는 날에 나를 맡기고
서쪽으로 울음 한 덩이 떼어 보내면
나도 스스럼없이 늙어갈 수 있을까
계절 가고 단풍 질 때까지 살아 있어 서럽다
낮은 생이 백년처럼 길다

 

 

 

*시인의 말

 

네 있는 곳이 막막하고 아득하여도

엄마가 곁에 있을 거야

 

행성을 표류하는 김희준 시인에게 기별이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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