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찾아온 아이 - 김진규

마루안 2021. 12. 12. 19:23

 

 

찾아온 아이 - 김진규


그 먼 옛날 죄가 크면 발을 자르라 했다
그리하여 나는 발 없는 자의 무릎을 떠올린다
가장 낮은 자세로도 갈 수 없는 목소리 앞
왕의 광장이 넓게 펼쳐진다


그 먼 옛날 다툼이 있으니 가두라 했다
세상은 밤이 되고 밤은 피부가 되었다
깜깜한 배고픔 위로 뼛조각 같은 별이 부서졌다
먼 곳에서 지켜보는 왕의 관음을 생각한다
보이지 않던 죄가 왕에게 가면 거울처럼 빛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왕을 훔치고 싶었다
굽혀지지 않는 무릎을 가지고 싶었다
바퀴로 세상을 밀어내던 시절에
걷지 못해 낮은 자세로 기어다니던 날들
죄를 짓지 않았는데, 그랬던 것 같은데
내 다리에 모르는 별들이 한참을 돌아나갔다

그 먼 옛날 거짓을 말하면 혀를 태웠다
부모를 위로하면 그 밤엔 혀가 타들어갔다
왕의 혀는 가장 불타는 칼이었다

그리하여 왕이 되고 싶었다
커다란 사원을 꼿꼿이 내려왔다
잊었던 형제의 죽음을

부모에게 듣던 날부터

나는 모서리처럼 단단하게 서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왕처럼 생긴 것이 나에게 걸어온다

 

 

*시집/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여우난골

 

 

 

 

 

 

초지 - 김진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푸른 숲

거기, 표지판에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말

 

날아든 새는 꼭 같은 자리에 앉아 운다, 가는 다리를 허공에 털며

 

잊고 살던 곳

오래된 낙서는 그 시절 가장 간절한 고백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우린 비밀을 말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물방울들이 하늘에서 종종 떨어졌다

 

읽을 수 없는 문장들 사이엔

우리가 함께 그려둔 것들이 있을까

우리 없이 한 시절을 살며 지워지고 있을까

소리 내어 말하고 나면 지나가는 시간들

 

이 골목을 지날 때마다 너는 중얼거렸다

가만히 웅크려야만 전할 수 있는 말들을

 

마주보면 멀어지는 그림자

 

막다른 골목, 돌아서면 다시 끝없는 골목

어린 네가 나의 손을 잡고 걷는다

거기 멀어지는 표지판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말

 

한때 우리의 집이었던 곳으로

네가 먼저 걸어가면 나는 가만히 손을 흔든다

같은 표정을 한 우리가 멀어진다

 

 

 

 

# 김진규 시인은 경기도 안산 출생으로 201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2017년 경기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 시부문에 선정되었다.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이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