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회복하는 인간 - 정철훈

마루안 2021. 12. 5. 19:29

 

 

회복하는 인간 - 정철훈

 

 

새벽 3시, 잠이 안 와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니

누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 같다

거실에 켜진 불이 후광이 되어 인체 비례가 선명하게 보였다

 

두 팔을 벌린 길이는 신장과 같다,

라는 비례를 통한 인체의 구조는 이 새벽에

두 팔을 벌린 길이는 슬픔의 크기와 같다,

라고 수정되었다

그게 아니면 그 시간에

담배를 빼물고 연기를 내뿜을 리 없다

그게 아니면 나 역시 왜

그 시간에 깨어나 당신을 보는가

 

캄캄해져야 시야의 회복이 가능하다면

극장에 간 횟수만큼 회복됐어야 했다

불이 꺼지면 회전하는 지구가 보이고

우주에서 날아온 유니버설 로고가 지구를 에워싸는가 싶더니

차르륵, 소리와 함께 필름이 끊겨버린 악몽

뭔가 잘못됐다는 이번 생의 오프닝 크레딧

지구도 회전하면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눈을 돌려 길 건너 상가를 바라보니

지붕 위 십자가에 빨강 불을 켠 교회가 둘

교회는 둘이지만 같은 목사는 아닐 테고

종교도 살짝 어긋나 있다

 

어긋나 있다는 게 굉장한 발견 같다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다

잠이 안 와 혼나고 있다

 

 

*시집/ 가만히 깨어나 혼자/ 도서출판 b

 

 

 

 

 

 

반성의 멜로 - 정철훈

 

 

저녁 여덟 시

프라이팬에 고등어 한 토막을 튀겨

혼자 밥을 먹었다

한 시간 뒤 귀가한 딸이 들어서자마자

냄새가 너무 난다며 주방 후드를 틀고

창문을 열어젖혔다

나름 후드도 틀고 창문도 열어놨었다

며칠째 혼자 먹는 저녁도 서러운데

내뱉는 첫마디가 냄새 운운이라니

딸이 야속할 때 야속이 내게 돌아와

냄새를 풍겼다

그만하면 충분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하루가 그럴싸하게 마무리될 리 없다

딸은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친정 간 아내는 내일 오겠다고 전화를 했다

사물들이 이렇게 제자리를 잡았으니

제대로 살았다는 기분이 든다

이 기분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외롭지 않다고 느낄 수 있게

딸과 오래오래 말하길 희망하며

반성의 멜로를 모색할 수 있게

 

 

 

 

# 정철훈 시인은 1959년 광주 출생으로 러시아 외무성 외교아카데미 역사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 <창작과비평>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살고 싶은 아침>,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드냐>, <개 같은 신념>, <빼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 <만주만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