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끗 - 이정희

마루안 2021. 12. 6. 21:58

 

 

한끗 - 이정희

 

 

공중이 휘어지면

계절의 한 부분이 꺾인다

 

휘어짐의 끝은

붉게 익은 홍시 몇 개 달려 있는 것

높은 곳의 가지를 휘는데

튕겨나가며 잘 휘어지지 않는다

그건 감 몇 개를 지켜내겠다는

나뭇가지들의 완고한 힘이다

그들만의 반경이고 외침인 것이다

 

높은 것들은 다시

높은 것들이 와서 먹겠지만

허공은 한 번의 그 빈자리를 망각한 적 없다

 

잡아당겼던 힘으로 겨우

이파리만 훑어 민망한 적 있다

나뭇가지들은 휘어지는 일로

얼마나 자신을 증명해야 할까

무수한 사이와 간극에

함몰된 긴장을

허공으로 튕겨 내려했을까

불안의 간격 그 갈라진 틈 사이

한끗으로 비켜간 안도가 수북하다

 

끝까지 지켜낸 것들은

결국 바닥의 것이 되겠지만

휘고 또 휘어지더라도

지켜내고 싶은 생명이 있다

 

 

*시집/ 꽃의 그다음/ 상상인

 

 

 

 

 

 

꽃의 폐업 - 이정희


꽃도 따끈할 때 꽃이지
식으면 폐업이다

리어카에 실린 채 방치된
국화빵을 구워내던 틀
한때는 한 봉지의 가을이 제철
따뜻했다는 증거

기억을 붓고
시간을 노릇하게 뒤집으며
사는 일이 다 그런 것이라 믿었다
쉴 틈 없는 반복이
일생을 끌고 간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붙들지 못한 가을이 몇 번 지나갔다
추웠던 꽃의 틀이 녹슬고
뜨뜻미지근한 가을볕도 없이 겨울이 왔다

볕 좋고 목 좋은 모퉁이는 점점 줄어들고
철컥철컥 꽃 피우던 가을은
너무 비싸졌거나 멀리 있다

바람이 보채는 곳마다
안간힘 쓰는 꽃잎들과
단단히 묶인 포장의 날갯짓

녹슨 틀에 다급한 생계를 넣고
꼬챙이로 칸칸 노란 국화를 뒤집으면
따뜻한 그 봉지를 안고 돌아갈 것 같은데

햇살이 철컥거리며 그림자 빵을 구워낸다
꽃의 그다음은 믿지 않는다

 

 

 

 

*시인의 말

그다음을 앓는다
수많은 내일이 지나간다
바람이 치어 떼처럼
멀어진다 더 가까워진다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