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작위적이라는 방이 있었다 - 이은심

마루안 2021. 11. 30. 21:47

 

 

작위적이라는 방이 있었다 - 이은심

 

 

문을 두드린다

응답하지 않는다

안에서 밖을 잠근다

 

견디는 방식이 문제다

 

문을 연다

텅 빈 방이 방을 업고 나간다

 

못 견디는 방식이 문제다

 

독실한 내일에 월세를 지불하지 않았으므로

뺨을 지나 옷깃을 지나

한없이 빈곤한 고양이가 트럭 밑에서

비에 젖은 바닥을 꺼내온다

 

고양이도 생활고를 알까

 

모과를 떨어뜨린 나무와 아이를 놓친 창문과 종일 식탁보처럼 흘러내려서

백수인 거야

바닥을 다 울고 나면 울음은 또 어떤 바닥을 쳐야 하나

 

내일이라는 방을 예약하지 않고 갑자기 알게 된 슬픔 앞에 빈방만 놓고 돌아섰다

나도 내 젊음에 폐업 쪽지를 붙이고 싶을 때가 있었으므로

그 쪽지가 너풀거리는 곳에

흰 꽃 한 송이 두고 싶을 때가 있었으므로

 

 

*시집/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상상인

 

 

 

 

 

 

나는 - 이은심


우스운 일이지

내 단골 가게들은 얼마 못 가 폐업한다 머리핀을 사면 머리를 자르고 책을 버리면 문장이 온다 이것이 한 번도 틀리지 않은 내 미신이다

엄연하게 나를 가르치던 수천 갈래의 희로애락

여기가 나를 낳고 낳았던 퀴퀴한 덤불이다

열 걸음이면 닿는 비정과 다정을 사방연속무늬로 한몸에 새기고 애증에 찬 시간표가 나를 키웠다

너는 타락처럼 빨리 자라는구나 이것은 더 이상 클 수 없을 만큼 커버린 내 유머다

 

순해지는 마법의 솥을 걸고 부드러운 음식을 지어먹었다 절망과 좌절이 불어오는 식탁에서 제철 음식이 자라나다니 너는 비애처럼 배만 나왔구나

복종하는 칼의 어두운 면을 날카롭게 갈아 텃밭의 무거운 아침이슬을 베었다

믿음을 믿자 믿음을 믿자

베어도 죽지 않는 죄를 찻물 삼고 내가 모르는 주전자가 잊지 않고 나를 들이켰다

 

무사해서 나는 겨우겨우 보통인가

가로등 아래 토해놓은 지난밤이 지나치게 낭자한 나를 중계한다 양파의 속울음처럼 거침없이 평범한 것들은 왜 낄낄거리고 있는가

되도록 천천히 될 수 없어도 천천히 일요일의 쿠폰을 종류대로 다 써버린 나는 헛것처럼 앓는 자 왼손으로 준 것을 오른손으로 받으며 멍한 채 누덕누덕하다

이것은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내 반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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