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늘은 없는 날 - 김선우

마루안 2021. 11. 30. 21:35

 

 

오늘은 없는 날 - 김선우


아무것도 안 하는 중이에요 행복하고 싶어서

정치 마케팅과 상품 마케팅에 유혹당하지 않게
말 많고 현란한 매체들에 귀 닫고 눈 감아요
돈이든 권력이든 세력 불리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
필요와 정의 타령에 넘어갈까봐 하늘을 봐요
조용히
더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

눈 뜨니 오늘이 있어
없는 날이라 부르기로 해요

없는 날에 할 일은
바람 속에서 시집 몇 페이지를 천천히 읽고
아침과 저녁의 산책을 출생 이전처럼 하는 것

지구가 우주의 일원으로 오늘을 걷고
운 좋게 지구에 탑승한 오십년 차 승객인 나도
지구와 함께 걸어요
지구 입장에선 자갈돌 하나인 나
우주의 입장에선 티끌 한 점도 안 되는 나
이토록 작은 존재에 허락된 하루를 오직 감사하면서

오늘은 없는 날
행복하고 싶어서
구름 버튼을 눌러 당신 목소리를 들어요
나야, 바람이 좋아
나와 함께 당신이 살아 있어 이렇게나 좋아
더 많이 아낄 수 있어 더 없이 좋은 날
사랑하는 일 말곤 아무것도 안 할래

어제도 내일도 없는 오늘
많이 행복해서
당신과 함께 산으로 가요
없는 날의 자유
푸른 바람 속을 무한무한 걷고 달려요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지구라는 크라잉 룸 - 김선우

 

 

구름 많은 날 당신의 울음이 가깝다

 

울다 깬 눈으로 구름을 만진다

오늘도 어김없이 지구 어디선가

죄 없이 아이들이 죽고

죄 없이 동물들이 사라지고

죄 없이 숲이 벌목되고

죄 없이 작은 것들의 노래가 짓이겨져 파묻힌다

 

착취한 것들로 만들어진 자본의 폭식성--

멈출 줄 모른다 착취가 동력이므로

 

한때 아름다웠던 별

어디에 무릎을 꿇어야 죄를 덜 수 있나?

불과 이백년 만에 이토록 뜨거워진

인간이 만든 쓰레기로 가득해져버린 여기 어디에

 

지구라는 크라잉 룸

당신 안에서 우느라 당신의 울음을 미처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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