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바깥 - 이문희
내가백합과 목련의 다름을 인정해서 겨울이 왔다
푸른 초원이 펼쳐진 사바나를 구글에서 검색하다가
검은 기린
흰 기린을
처음 보았다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 끝 적도에는 아까시나무와 바오바브나무가 보인다 한 여자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마당엔 빨래가 깃발처럼 펄럭인다 향기로운 꽃들이 피었다 지는 사이 사랑의 중심엔 커피가 끓고 있다 침대 모서리엔 남자의 파자마가 걸쳐 있고 어젯밤 쓴 시가 화장대 위에 반쯤 구겨져 있다
검은 기린은 얼마나 고민이 많아 검게 되었을까
왜 나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다시 봐도
검은 기린은 나 같고
흰 기린은 너 같은
나를 꼭 닮은 검은 기린을 생각하면
겁 많은 눈으로 멀리 표정을 살피다
물기 젖은 나뭇잎을 먹고 속눈썹에 잠이 맺혀 별을 당긴다
너를 닮은 흰 기린은
줄무늬 셔츠를 입고 왜 밝은 걸까
긴 목에 울음을 꾹꾹 삼켜 캄캄한
견딜 수 없는 것들은 발이 시리도록 꿈에 젖을까
시간을 놓아버린 것들이 사바나에 피어 있다
사계절 뜨겁고 웃고 있다
어제도 내일도 역시 그럴
그 기린이라는 나
나는 어느 별에서 떨어진 우주 꽃씨일까
진흙일까
*시집/ 맨 뒤에 오는 사람/ 한국문연
저녁의 독백 - 이문희
나는 마음을 닫으려 애쓰는 사람
순간들이 순간, 순간 물 위로 파문 질 때마다
매번 당신을 지운다
내가 원한 건
슬픈 기억이나 아름답던 추억 따위들과 최대한 멀어지는 일
영원히 결별하는 일입니다
당신과 갔던 위봉산성 냉이 밭엔
왜 그리 배추흰나비들이 많았는지
한 송이 하늘말나리를 꺾어 주는
당신 이마는 왜 또 그리 푸르렀는지
포구 근처 어디쯤 당신의 주머니에서 꺼내준 검은 돌
그 형형한 물의 검은 눈동자가
왜 자꾸 캄캄한 머릿속 별로 뜨는지
그 검은 돌이 왜 흰빛이었는지
그 돌에 나는 순례자처럼 입 맞추고 싶었는지
지상에 사는데 마음은 반지하 같은
사소하고도 아주 사소한 이 저녁
왜 난 당신을 짓고 싶은 걸까요
까만 씨앗 같은 당신을 키우고 싶은 걸까
어둠에 삽질하며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어둠에 삽질하며 무언가 찾고 있는 사람처럼
슬픔 휘어지기 전
슬금슬금 슬픔이 스며들기 전
모르는 척 뻔한 얘기를 혼자 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말
언제나 마지막 말은 마지막이 되지 못했다
다음날이면 수북이 말들이 쌓였으니까
그 말들이 다른 말이 될 때까지
나는 좀 더 나은 내가 되려 한다
내가 어딘가에서 자꾸만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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