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 위의 방 - 홍성식

마루안 2021. 11. 26. 22:43

 

 

길 위의 방 - 홍성식


소진한 기력으론 신(神)을 만나지 못한다
황무지에 달이 뜨면
갸르릉 도둑고양이 울고
집 나간 누이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은 밥상에 마주 앉은 데드마스크들
시간은 석고처럼 창백하게 굳고
조롱의 숟가락질, 싸늘한 만찬이 끝나면
표정 없이 젖은 침대에 드는 사람들

어쨌거나 창 너머 달은 또 뜨는데
째각대는 시계 소리에 맞춰 계단을 올라
어둡고 축축한 방, 문을 열면
나신의 엄마
그녀로부터 시작하는 하얀 비포장길
꿈에서도 달맞이꽃은 흐드러졌는데
길을 잃은 자, 길 위에는 방이 없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불혹 - 홍성식

 

 

길 위에서 길을 찾다 길에 눕는다

메마른 얼굴을 쓰다듬는 유년의 바람

해서, 내내 낯선 길만이 매혹적이었다

 

열아홉, 스트리퍼의 젖꼭지를 본 날

우주는 더 이상 내밀하지 않았고

슬픈 세상사와 상관없이

바다는 살인자의 눈동자처럼 푸르렀다

 

지문이 기억하는 아득한 전생이 있어

근친상간을 꿈꾸며 살아온 사십 년

누구에게도 발설치 못한 아득한 진실

하늘은 이미 나를 용서했다.

 

 

 

 

# 홍성식 시인은 1971년 부산 출생으로 광주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다. 2003년 <시경>으로 등단했다. 몇 곳의 신문사를 옮겨 다니며 20년 가까이 기자로 일하고 있다. 시집으로 <아버지꽃>, <출생의 비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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