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폐막식을 위하여 - 서윤후

마루안 2021. 11. 25. 21:55

 

 

폐막식을 위하여 - 서윤후


이 무대를 끝내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서둘러 빛을 꺼내려고
벼락을 샅샅이 뒤지던 날에 기록한
망가진 그날의 일기가
오늘 무대의 조명을 갖춘다

인형탈을 벗고 쉬는 용서를 보았을 때
지혈되지 않던 밤의 기쁨을 알게 되고

함부로 깨웠다가 영영 잠들지 않는
자명종을 목에 걸어주고는
꿈에서만 참견하는 악몽이 되어주기로 한다
익숙하고 끔찍한 친절함으로

골절된 영혼의 인형극에 몰입하며
차례를 기다린 건지도

바닥난 사랑에도 이 무대는
영영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의 독백을 지우고는
삶을 퇴고하게 된다

다음 행복을 모사하는 것도
슬픔이 가진 배역이었기에
머지않은 출구를 열지 못하고
벼랑 끝에 서 있다

무대에 두고 온 이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누구도 버린 적 없어서
아무도 끝까지 읽은 적 없는 시

사랑에 흠씬 두들겨맞고도 계속해서
포옹을 여는 사람에게

이제 아름다운 퇴장을 보여줄게

 

 

*시집/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정물원 - 서윤후


신비로움을 간직한 새들만이 총에 맞았다
죽은 듯 산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누구도 넘으려고 하지 않던 펜스를 넘어
나무를 거창하게 흔들었다
눈빛이 깨지고 숲의 내재율이 깨어나게 되었다

열거가 필요한 순간에는 침묵했다
그건 오랜 묘기에 지친 자들의 장기였으나
구경거리를 자처했다

움직이면 탄로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말동무가 죽어나가는 숲속에서
나는 희귀종이 되었다
혼자가 용서되는 시간이었다

목 조르고 싶은 마음 따위가
계속 살고 싶어 안달이 난 게 의아하다
그것이 난간을 계속 걷게 하고
나의 곡예가 누군가의 유머로 둔갑하는 게
식상하고 재미있었다

숲을 샅샅이 뒤지는
헌팅트로피로 과거의 영광을 지닌 자들이 겨누는
눈 밖에 나기 위해서
나는 나를 의심하는 능력을 길렀다

살아 있는 것을 가두고는
오랫동안 걸었다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는 숲으로
숲이 자신이 숲임을 잊은 숲으로

 

 

 

# 서윤후 시인은 1990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9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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