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외로운 사람은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 이현승

마루안 2021. 11. 20. 21:25

 

 

외로운 사람은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 이현승


마치 백년 전에도 태극기를 흔들었던 것처럼
오늘의 거리에는 노인들이 많다.
개항과 자주가 붙었다 떨어졌다 했던 백 년 전처럼
태극기 옆에는 유대의 깃발들이 보이고
박근혜 석방, 문재인 OUT을 앞뒤로 새긴 피켓을 향해
박근혜 X X X ! 인도 쪽에서 누가 쏘아붙이자
노인의 눈에서 다시 화염이 일었다.

백두산은 휴화산이 아니라 활화산이었다.
천년 전에 한반도를 1미터 두께로 뒤덮었던 화산재조차
어떤 풍요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죽은 풍뎅이를 잘라 나르는 개미떼를 보듯
자연의 편에선 다 합리화가 가능하고
잘못된 선택과 행동조차 교훈을 남긴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허기보다 착찹한 진실로 남는다.

지난 백 년 동안
제국주의에 맞서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웠지만
싸우며 가난과 무지를 건너왔지만
마침내 맛집 앞에 줄 선 사람들처럼
우리를 무너뜨린 것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워서 먹고 화가 나서 더 먹어치웠지만
먹어서 배가 부르고 살 만해지면
주려 욕이 비어져나오는 맞은편 사람도 보인다.

보인다는 게 이렇게 안심이 된다.
무너진 사람은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그 사람도
뭘 봐? 화난 사람 첨 봐? 한번 더 소리쳤지만
화난 사람이 화내면서 더 화나듯이
우리는 부끄러워서 울고 울면서 부끄럽다.
아무리 그래도 뭘 먹으면서도 화내는 사람을  보면
아직 겨울 외투를 입고 있는 봄처럼
마음이 춥고 외롭다.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꽃 시절 - 이현승

-민정에게

 

 

진수성찬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서

물이 제일 맛있다고 한 분은 친구의 아버지였다.

세상 단 한 사람의 원한을 대가로 완성되는 유머라고나 할까.

농담 비슷한 말에 딸려오는 원한 앞에서 겸언쩍어하던 양반,

하긴 가족끼리 이번에도 정말 맛있었습니다

내일의 메뉴는 무엇입니까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른들이 입맛 있을 때 많이 먹어두라고 하실 때마다

나는 입맛도 있고 뭘 넣어둘 수도 있지만

식사가 꼭 허기를 채우는 것은 아니라서

너무 배가 고플 때는 외려 먹을수록 허기가 지고

허겁지겁 먹다보면 어쩐지 텅 빈 자루가 되는 것 같은데

 

늙은 얼굴이 궂어 사진 찍기 싫다고 한 것은 어머니였다.

인생에는 조연이 없다는 걸 꽃처럼 낯붉히며 들키는 사람

떨어지기 시작한 꽃의 뒷모습에서 제 청춘을 보는 사람

아무 연고도 없는 행인을 보며 자꾸

지금이 좋을 때라고 돌이키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

그리고 외로운 사람은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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