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깃털 하나를 주웠다 - 김선우

마루안 2021. 10. 31. 18:59

 

 

깃털 하나를 주웠다 - 김선우

 

 

나만 아는 흰 산이 있다,라고

호숫가 저녁놀 옆에서 중얼거린 순간

깃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주워들고 호수에 떠 있는 오리들을 헤아려본다

누구의 어디를 채워주던 깃털일까?

흘려야만 해서 흘린 걸까? 흘려서 혹시 아픈 걸까?

 

손가락 하나를 접은 자리에

깃털을 대본다

손가락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깃털손가락 하나

이번엔 손가락을 모두 그대로 두고

깃털을 대본다

손가락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깃털 하나

 

어느 편이 생을 지키는 데 유리할까?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지금은

언제나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래서 생은 나아간다

나만 아는 흰 산이 있다고 중얼거리면서

나만 알고 있다고 믿는 흰 산 쪽으로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작은 신이 되는 날 - 김선우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먼지 한점인 내가
먼지 한점인 당신을 위해
기꺼이 텅 비는 순간

한점 우주의 안쪽으로부터
바람이 일어
바깥이 탄생하는 순간의 기적

한 티끌이 손잡아 일으킨
한 티끌을 향해
살아줘서 고맙다,
숨결 불어넣는 풍경을 보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날

 

 

 

 

# 김선우 시인은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녹턴>, <내 따스한 유령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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