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비의 그대들 - 우대식

마루안 2021. 10. 22. 22:30

 

 

가을비의 그대들 - 우대식

 

 

가을비에 하루를 탕진하고 막걸리 잔을 든다

신성한 밤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 밤이다

부풀어 오른 허무의 알갱이들이

빗속을 둥둥 떠다닌다

젖은 발을 부비며

떠돌던 골목 술집들을 떠올린다

가을비 내리던 밤은 다 어디로 갔나

백열등 아래 김이 오르던 주막에서 키득대던

가을날의 그대들은 어디로 갔나

가을비여

젖은 책장을 넘긴다

젖은 그대를 넘긴다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잔상(殘像) - 우대식

 

 

비가 온다. 호박잎에 무수히 떨어지는 빗줄기,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을 듣는다. 내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는가? 한 세월의 풍경을 이렇게 그려도 되지 않겠는가? 먼 들판을 바라본다. 어떤 망설임 앞에 선 낙수(落水)처럼, 망설임이라는 말 앞에 잠시 정차한다. 제천역이든가 우동 한 그릇을 비우고 뛰어올라야 하는 중앙선의 정차 시간 정도.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래된 우물가에 기차 소리의 잔향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 힘으로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남겨놓은 잔상. 누더기 옷을 입고도 더러 뽐을 냈으니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한겨울 새벽 화엄사 절집 앞에서 떠돌던 날도 있었다. 이마를 쓸고 가던 한 줄기 바람 때문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다른 무엇으로 거래하려던 날들. 호박잎은 둥글고 넓다. 온전히 비를 맞고 흔들리고 있다. 그 흔들림이 좋다.

 

 

 

 

 

# 우대식 시인은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1999년 <현대시학> 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 <베두인의 물방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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