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안에 머물던 새 - 박남원

마루안 2021. 10. 23. 21:58

 

 

내 안에 머물던 새 - 박남원


내 안에 한동안 머물던 새는
반은 떠나고 반이 남았다.
그래서 떠나버린 것도,
다 남아있지도 않은 네가 나를 아프게 한다

꼭 반은 떠나고 반은 남았으므로
나는 온전히 너를 떠나보낸 것도
내 안에 온전히 잡아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다 날아가라고 , 다 날아가버리라고
대문을 열어두고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으나
그러면 다 떠나버릴 줄 알았던 너는 이번에도 단지 반만 떠나고
여전히 반은 계속 남아있다.

다 떠나버리거나 내 안에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너는
하루 종일 바람 부는 바다 기슭 같은 데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해가 저물면 기어이 내 가슴의 문을 열고 날아 들어와
내 심장의 벽에 모이를 쪼며 밤새 쿡쿡쿡 바늘을 찔러댄다.

한번 와서는 어디로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밤이 다 가도록 너는 내게 와서 바늘을 찔러대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신음소리를 내며
울음을 참듯 너를 눌러 참으며 밤새 앓는다.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도서출판 b

 

 

 

 

 

 

균열의 기억 - 박남원


볕 잘 드는 오후, 페인트공 몇 명이
금 간 건물의 외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다.
밀려든 파도가 백사장을 적시듯
점차 건물에 색이 덮여지고
흠집이 말끔히 지워진 건물은 이제 봄날처럼 화사하다.
일을 마친 다른 인부들은 다 떠나고
마지막 남아있던 페인트공이 작업복에 묻은 얼룩들을 털어내고 있다.
이제 그마저 이곳을 떠나고 나면
건물은 금이 간 스스로의 비밀을 간직한 채
어쩌면 평생을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언젠가 그대가 무심히 버리고 떠난
내 오래된 상처의 기억처럼.....

 

 

 

 

# 박남원 시인은 1960년 전북 남원 출생으로 숭실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노동해방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막차를 기다리며>, <그래도 못다 한 내 사랑의 말은>, <캄캄한 지상>,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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