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유령은하 - 윤의섭

마루안 2021. 10. 22. 22:41

 

 

유령은하 - 윤의섭


길 끝에는 길이 있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속도로 가을은 늙어갔고
야간 등산로를 알려주는 표지판을 지나 몇몇은 다음 계절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여기까지 와보지 않았다
언제부터 파국 너머로 내닫기를 멈춰왔던 것일까

말라붙은 저녁의 태양처럼 나는 건조한데

방금 스쳐간 누군가에게선 베이비 로션 냄새가 났고
내게선 수십 년이 거슬러 흐른다 너는 다른 로션을 바른 적 없었다

감각이 고통스러우면 기억이 아픈 것이다

내가 덜 미치고 내가 덜 다가섰을 때
숨은 거라고 믿었다면 들키지 않았을 뿐이며
내가 나로부터 떨어져 나와
길의 관성을 어긴 채 늘 길의 궤도 안으로 되돌아간 것이라면
원일점에 다다랐어도 견뎌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감옥이니
한 뼘 창문으로는 곧 눈의 은하가 흩뿌릴 것이다

가로등이 켜지고 기억이 소등된 자리에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편두통 - 윤의섭


평행우주를 믿는 편이다
이 저녁에 당도한 나보다 훨씬 아픈 하루를 겪은 내가
다른 차원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 편이다
첨단 망원경으로도 관측되지 않는 불가해한 그곳은
사방에서 사지를 찢을 듯이 잡아당기는 중력에 익숙할 것이다
신이 없으므로 신의 권능을 찬탈하려는 음모와 배신과 가해를
평범한 일상으로 알고 사는 행성이라고 규정해야 한다
사랑 행복 같은 것이 있겠지만 지속되면 안 된다는 전제라도 있는지

멀쩡하다가도 가끔씩 통증을 일으킨다
편두통이라고 부르기로 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진단에 대한 처방은 양자이론이었다
용납해 보려고
고통의 간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다른 세상에서 발생한 내 고통의 파동이 간섭효과를 일으키는 거라고
참아 보려고

망상의 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피어난다
뿌리는 없고 꽃만 자라나 노을처럼 이 저녁을 뒤덮고
앓는다는 행위를 내가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기망하고
증명되지 않은 또 다른 나를 힐난하고

나는 무사하지 않다

편두통이 피어날 때 우주적이다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리며 다른 세상 저편에 사는 나는
지구에 대한 편협된 역사를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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