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달과 전봇대와 나 - 정철훈

마루안 2021. 10. 17. 21:18

 

 

달과 전봇대와 나 - 정철훈

 

 

도시는 빌딩마다 달이 켜져 있으니

그게 달인지 심통 맞은 알약인지 모르겠다

지금 눈에 보이는 달은 소화가 되지 않는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소화제라면 모를까

달이 전봇대 끝에 일직선으로 떠 있다

끝은 위태로워서 달도 위태롭다

달이 전봇대에 왔을 뿐

전봇대가 달에게 갈 리 없다

달이 위험하다

전봇대도 위험하다

둘 다 서로의 끝이므로

달이 전봇대 끝에 매달린 벌레집 같다

벌레집을 누가 파먹고 있다

달이 뜨지 않는 날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달이 되고 싶었다

일직선으로 가능한 게 있다면

달과 전봇대와 나였다

나는 그렇게 견딘다

먼지가 되기 위해

나에게 닿기 위해

 

 

*시집/ 가만히 깨어나 혼자/ 도서출판 b

 

 

 

 

 

 

그곳과 이곳 - 정철훈

 

 

내가 귀촌을 미루는 것은

그곳에서 노동을 찾지 못해서다

해는 빨리 지고 밤은 일찍 찾아오는 그곳은

지금 여기와 같이 저녁 8시다

모두들 설거지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시간

 

노동거리가 없으면 두 배는 빨리 늙을 것이고

암흑 속에서 혼자 깨어 뭔가 써보겠다며

눈을 끔벅거리고 앉아 있는 게 내 노동의 시작일 터

그렇게 밤낮이 바뀌어서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고

그 밖에도 오래 버티지 못할 이유는 많다

 

그런데도 그곳이 수시로 생각나고

생각날 때마다 전원일기 다시 보기를 켠다

그곳의 희로애락이 다 있는 전원일기

다 알고 있는데도 그곳이 그곳인 것은

이곳이 아니어서일까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인가

매달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마루 밑은 해마다 물이 새고 베란다 외벽은 삭아내려 녹슨 철근이며 벗겨진 벽지며 우는 아내며

이곳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많다

 

이곳을 규명하지 않으면 그곳에 갈 수 없고

그곳에 가도 그곳은 아니다

대체 이곳은 어딘가

 

이곳은 내 살아온 습관이 있고

빚은 많아도 내 오랜 번지수였으며 가쁜 숨을 헐떡거려도 내 심장, 내 폐부였으며

홀로 된 어머니 집과 전철역이 가깝고 무엇보다도 내가 살아남은 곳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

이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

몇 번이나 잠을 설친다

 

 

 

 

# 정철훈 시인은 1959년 광주 출생으로 러시아 외무성 외교아카데미 역사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 <창작과비평>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살고 싶은 아침>,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드냐>, <개 같은 신념>, <빼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 <만주만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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