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아버지의 첫 직업은 머슴이었다 - 한대웅

마루안 2021. 10. 17. 21:06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롭게 읽었다. 1941년 생 아버지의 일생을 1969년 생인 아들이 기록한 책이다. 아버지의 구술을 아들이 받아 적어 책으로 낸 것이다. 평범한 한 아버지의 일생이 어떤 위인전보다 값지게 읽혔다.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에 더욱 생소하면서 흥미로웠을 것이다. 내 생일과 아버지 기일은 며칠 차이가 나니 않을 정도로 나는 간신히 유복자를 면했다. 나는 애틋한 자식이 아니라 젊은 어머니의 재혼길을 막은 불효자였다.

 

어렸을 때 친구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살림을 부수고 처자식을 때렸다. 그럴 때마다 온 가족이 뿔뿔히 흩어져 동네 남의 집으로 피신을 했다. 친구는 늘 한참 떨어진 우리집으로 숨어들었다. 한참 후 잠잠해지면 돌아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우리집에서 자고 갔다.

 

그때 "저 새끼 빨리 뒤졌으면 좋겠다"며 아버지를 저주하던 친구의 얼굴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없는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는 왜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보다 노름을 하거나 술 먹고 고함치며 욕을 하고 때리는 아버지들이 많았을까.

 

드물게 부러운 아버지도 있었다. 어느 날 학교를 파하고 돌아올 때 길에서 만는 친구 아버지가 아들에게 과자 봉지를 쥐어준다. 축 내려간 친구의 바지춤을 올려주는 다정함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이 책 이야기로 돌아간다. 학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한 저자의 아버지는 열 다섯 살에 머슴을 시작으로 밥벌이에 나선다. 이후 경기도 가평에서 산판 일과 창호지 공장에서 일을 한다. 임금은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과 쌀을 받거나 푼돈이었다.

 

청년이 되면서 창호지 공장 사장의 딸과 결혼을 한다. 사장의 사위가 된 셈이다. 그러나 꽃길이 아니라 가시밭길 연속이다. 개량 주택이 늘어나면서 창호지 수요는 급격히 줄어든다. 아버지는 창업과 실패를 거듭한다.

 

중동 근로자로 리비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일한다. 다행히 타고난 성실함과 튼튼한 체력 덕분에 조금씩 살림이 불어난다. 아버지의 일생을 적었다지만 부창부수라고 어머니 역할이 절반이다. 부모는 서울 신월동에서 생선장사를 시작으로 닭장사로 자리를 잡는다.

 

신월동 무허가 건물 전통시장에서 20년 가까이 닭장사로 자식들 키우고 돈을 모은다. 나이가 들자 저자의 부모는 가게를 접고 2004년 가평으로 이주 현재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아버지를 본 적 없는 나는 노년의 아버지까지 생경하다.

 

학교도 가 본 적 없는 아버지지만 아들에게는 비빌 언덕이자 인생을 배우게 한 거울이다. <보증 서지 마라, 쉽게 살지 마라>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반복적으로 말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보증을 서지 마라, 보증은 부자간에도, 형제간에도 안 된다."

 

인정이 많은 아버지가 친인척의 보증을 섰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일자무식인 부모는 법정 싸움은 생각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그 빚을 떠 안고 갚느라 몇 년 동안 저축은커녕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그 짐을 안긴 것 때문에 평생 면목이 없었다. 보증 서지 말라는 철칙은 그때의 경험 때문이다.

 

어머니의 소원은 두 가지였다. "잠 실컷 자기, 대청소하기." 그 이유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일화는 이렇다.

 

<닭장사를 할 때 어머니의 하루는 새벽부터 시작됐다. 어머니는 아침을 준비하고 자식들 도시락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장사까지 했다. 부모님은 1년에 두 번 계모임 회원들과 관광을 갔다. 관광버스가 서울을 떠나 몇 시간 달린 다음 내장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뤄 내장산 단풍을 구경했다.

 

한참 후, 관광이 끝나고 계원들은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머니는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물론 도착 후, 계모임 회원들이 내장산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순간까지 잠만 잤다. 1년에 한 번 간 어머니의 내장산 관광은 주차장을 보는 것으로 끝났다. 어머니는 평생 부족한 잠을 쪽잠으로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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