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입속에 먼길이 생겼다 - 박지웅

마루안 2021. 10. 11. 21:41

 

 

입속에 먼길이 생겼다 - 박지웅

 

 

당신을 보내고 종유석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먼 동굴이 되었다

 

말문 한번 여는 데 천년만년 걸리는 입이 되었다

내 입속에 먼길이 생겼다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입안은 다만 내생(來生)과 연결되어 있다

먼 훗날에도 오지 않을 먼먼 훗날에

이 쓸쓸함은 발견되리라

 

목울대에 희미하게 비치는 한 방울 유골, 한 알의 누(淚)

똑, 똑

떨어진 바윗물은 흰 어금니가 된다

캄캄한 잇몸에 아물지 못한 말들이 자라고 자라

한 겹 한 겹, 솟을새김 올리는 액체의 뼈

 

동굴 천장바닥에 맺혀 글썽이는 눈알들

당신의 늑골에도 눈감지 못한 것들이 이리 자라는가

 

한 방울의 전생(前生)을 데리고 와 한 방울의 전생(前生) 위에 내려놓는 일을 나는 사랑했으니

입속에서 살아가는 것들의 목록을 헤아리는 가을이 북쪽으로 서쪽으로 만 번쯤 흩어진 뒤

동굴은 육신 다 비우고 목젖만 남기었으니

나의 말은 야행성으로 태어나리라

 

어쩌다 나는 뜨지도 감지도 못하는 말을 품었나

들숨 날숨이 빚은 한 섬 여덟 말의 사리를 훔쳐 이 행성의 밑바닥으로 내려왔나

 

먼길이 생기고 입속에 가을이 들어온다

늑골 아래 넓디넓은 데 들어와 그것들이 뼈를 묻는다

 

 

*시집/ 나비가면/ 문학동네

 

 

 

 

 

 

사흘 - 박지웅


문상객 사이에 사흘이 앉아 있다
누구도 고인과의 관계를 묻지 않는다
누구 피붙이 살붙이 같은 사흘이
있는 듯 없는 듯 떨어져 있다
눈코입귀가 눌린 사람들이
거울에 납작하게 붙어 편육을 먹는다
사흘이 빈소 돌며 잔을 채운다
국과 밥을 받아놓고 먹는 듯 마는 듯
상주가 사흘을 붙잡고 흐느낀다
사흘은 가만히 사흘 밤낮 안아준다
죽은 뒤에 생기는 사흘이라는 품
사흘 뒤 종이신 신고
불속으로 걸어가는 사흘이 있다

 

 

 

 

# 박지웅 시인은 1969년 부산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시와사상> 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너의 반은 꽃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나비가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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