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늘 바람이 불면 바람꽃 피어 - 유기택

마루안 2021. 10. 11. 21:33

 

 

오늘 바람이 불면 바람꽃 피어 - 유기택

 

 

지금 창밖에는 봄비 듣고

오늘 꽃이 불면 어떡하지

벼락같이,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제로

나를 만날 수 있는 날들이 하루가 줄었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면

미처 다 저물지 못하는 오늘로 그만이다

 

이 별에서의 작별은 늘, 오늘에 멈춰 있다

어제는 없고 내일은 언제나 너무 멀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꽃이 된다

지금은 손톱물 지두화 같은 바람꽃의 시절

수만 번의 손톱자국을 꽃잎으로 새기면서

오늘은 창백한 꽃물이 듣는 바람꽃이 핀다

 

나도바람꽃을 마지막 세우고

손톱 갈퀴 같은 바람 속에서도 꽃은 벌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매일

나는 오늘 또다시 어디서든 하염없이 멀다

 

지금도 밖에는 바람꽃이 불고

우리에게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줄곧 밖으로만 열리게 만든 목수의 문마다

문고리 같은 오늘이 매달려 낡아갈 것이다

 

저무는 말문들을 바람꽃이 이운다고 쓴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비가 내린다

문고리들이 말없이 피었다가 시들고 있다

 

 

*시집/ 사는 게 다 시지/ 달아실출판사

 

 

 

 

 

 

맹물 깨우기 - 유기택

 

 

사는 일은 누군가의 삶을 응원하는 일입니다

저도 모르게 그렇습니다

모르는 새 누군가 당신을 응원하고 갔습니다

당신도 그랬습니다

사람을 사는 일이 얼렁뚱땅 죄다 그렇습니다

복 짓는 줄 모르고 복을 짓습니다

 

큰일입니다

 

맹물을 자주 흔들어 깨우면 얼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일도 싱거워, 잘 어는 물이라면

한 번씩

이렇게 마음 흔들어놓으면 얼지 않겠습니다

 

그래 볼 일입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밀의 기분 - 고태관  (0) 2021.10.12
입속에 먼길이 생겼다 - 박지웅  (0) 2021.10.11
바람꽃 - 김용태  (0) 2021.10.11
노을 지게 - 하외숙  (0) 2021.10.10
발광고지(發狂高地) - 서윤후  (0) 2021.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