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종착역 근처 - 최영철

마루안 2021. 10. 1. 22:12

 

 

종착역 근처 - 최영철

 

 

오래 전 한 깨달음 얻은 그 사람 망자 앞에 문상하며

덩실덩실 춤췄다 하나 나의 도는 그에 미치지 못해

돌아서서 빙그레 웃을 뿐이네 아 이제 그대는

살기 위해 고개 숙이고 헛웃음 날리고

죽기 위해 지랄발광 술상 뒤집지 않아도 될 터

그리워 목말라 울부짖고 아닌 척 근엄하게

먼 산 바라보지 않아도 될 터

탄생에 환호하고 여기를 떠나 새 행장 챙기기 바쁜

여행자 앞에 목 놓아 통곡하지 않아도 될 터

한평생 내 그림자로 동행하며 다음 여정 설계해 준

고마운 이 저승사자 손을 뿌리치지 않다도 될 터

지옥이라도 그보다 더한 천국이라도

아 이번이 이 어리석은 암행의 종착역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

굳이 그런 사족 달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으리

 

 

*시집/ 멸종 미안족/ 문학연대

 

 

 

 

 

 

봄밤에 쓰는 사전장례의향서 - 최영철

 

 

이제부터 그 어떤 인위적인 연명조치도 사절이네

 

죽음이란 고단한 삶을 덮어주는 솜이불 같은 것 오래 망설여 도착한 손님 앞에 절대 눈물짓지 마시게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휴가 즐기고 있으니

 

빈소가 크고 번잡하지 않았으면 하네 그만하면 못다 한 이야기 나누기에 부족함 없으니 부의금 부디 사절이네 이렇다 할 유산이 없을 것이니 미안하고도 다행한 일 쥐꼬리만 한 저작료 수입 생기거든 여름밤 날 잡아 외로운 벗들 막걸리 파티나 열어 주시게

 

너무 버거운 걸 지고 왔으니 가장 헐한 나무관에 입던 옷이면 족하네 해진 육신의 늙은 오장육부 쓸 만한 게 있거든 어여 훨훨 벗어주시게 그래야 나 콧노래 흥얼거리며 먼 길 떠날 수 있으리 남은 가죽일랑 불꽃에 놓아주시게 한 줌 재가 남거든 저 먼 허공까지 날 데려다 줄 새가 쪼아 먹을 몇 톨 밥알이었으면 하네

 

이제 막 피어난 꽃송이 주렁주렁 앞세우지도 말게 그 또한 막 물오른 섬섬옥수의 가혹한 순장 아니던가 허방만 짚은 한 생 반추하느라 적적할 틈 없을 것이니 오만 잡스런 죄로 포박당해 끌려간 매년 이 날이 혹여 생각나거든 잠자코 먼 북망이나 한번 바라봐 주시게

 

침침한 길을 히죽이 웃으며 지나간 우둔한 사내였으니 망각에 들어 비로소 자유를 얻을 것이네 부디 그대 기억 속에 나를 가두지 말기를 그리하여 그때도 생전 처음인 듯 봄이 그대 삽짝 밖에 당도해 있기를

 

모처럼 볕살 따스하거든 그린내여

한 생을 마냥 주저하다가 끝내 하지 못한 몇 마디 중얼거림이라 여겨 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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