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먼저 된 사람 - 김한규

마루안 2021. 9. 27. 21:35

 

 

먼저 된 사람 - 김한규

 

 

형은 먼저 형이 되었다

 

마마가 어린 몸을 먼저 지나갔다

남겨진 자국에 죽어 갈 날이 하루씩 파고들었다

 

동생은 형의 동생이 아니라고 했다

아랫목에서 식고 있는 밥그릇이 넘어지고

 

먼저 될 수밖에 없었던 형은 눈이 파묻은 취한 발을 끌며 집으로 오고 있었다 기미가 없는 봄이 꺼멓게 멍든 뼈를 드러냈다

 

얼어붙은 발은 끝까지 팔을 움켜쥐고

기다리지 않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얼마 남지 않은 날에 파먹을 수 있는 것은 다 파먹고

달력도 없이 넘어가는 얼굴을 벽 속에 묻었다

 

먼저 되고 만 사람이 버스에 올랐다 거두는 눈길을 먼저 거두었다 다 거둔 얼굴에 죽은 새의 날개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동생은 형의 동생이 아니었으면 좋았다

눈과 함께 어서 가 버리는 이월이었으면 좋았다

 

다시 눈발이 검은 발등을 덮을 때

새 한 마리가 먼저 가는 사람의 얼굴을 뚫고 날아올랐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집/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 파란출판

 

 

 

 

 

 

냉장고 이불 - 김한규

 

 

오기는 했었나 한 시절

신나통을 끼고 하루 종일 현수막과

꽃병에 꽂히던 날이 가기는 했었나

 

큰절 아래 빈집을 찾아들어 숨었다 매표소 아래서 술을 파는 가게의 탁자는 젖었다 사방의 벽이 볕을 등졌다 

 

팔월 어느 날

살갗을 뚫고 나온 뼈마디를 부딪치며

그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았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다네 한 사람의 얕은 숨은 아랑곳없이 먼 구석에서는 폭죽이 터졌다 크레딧이 없는 한 편의 영화였네

 

위장을 잃은 채 

술 한 잔을 한 시간 동안 마시며

 

기록하지 않은 말이 방문을 닫았다 벽이 진땀을 쥐며 버텼다 굳이 피를 흘리지 말게나 힘겹게 눕는 그의 말에 뼈가 없었다

 

들고 간 냉장고 이불이 무색하였다 부지하지 않겠다는 목숨은 끝내 펜을 쓰지 않았다

 

앞서서 갔다

끌려가지 않았다

이를 갈지 않았다

 

 

 

 

# 김한규 시인은 1960년 경남 하동 출생으로 2017년 영남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