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 박남원 시집

마루안 2021. 9. 23. 19:36

 

 

 

아파트가 주된 주거 형태로 자리하면서 골목과 마당이 사라지고 있다. 가물가물하지만 내 어릴 적 살던 집은 허름한 초가였다. 마당 모퉁이에 장독대가 있고 한 켠에는 늙은 감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누렁이와 장난을 치다 감나무 그늘에서 함께 낮잠을 자기도 했다.

 

바지랑대를 아는가. 지금이야 세탁기와 건조기를 거치면 편하게 빨래를 하는 시대지만 예전에는 빨래도 노동이었다. 어머니는 빨래터에서 빨아온 옷들을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었다.

 

물기 머금은 빨래 무게 때문에 빨랫줄이 축 처진다. 이때 빨랫줄 중간쯤에 세워 축 늘어진 줄을 받쳐주는 바지랑대가 필요하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어릴 적 마당에 서 있던 바지랑대가 생각났다.

 

황폐해진 내 마음을 바지랑대처럼 받쳐준 시집이기 때문이다. 물이 뚝뚝 떨어지던 빨래는 바지랑대를 친구 삼아 바람에 살랑거리다 해가 지기 전에 뽀송뽀송해졌다. 시인의 말에도 바지랑대 같은 문장이 있긴 하다.

 

*산하나 넘으면 더 높고 험한 산과 마주하게 되는 이 쓸쓸하고 어려운 세상에 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뭐가 있겠는가. 외롭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이 시집이 조그마한 위로라도 줄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시인의 말 일부

 

지금의 내 상황이 그렇다. 항공이나 여행업처럼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것은 아니지만 수입이 점점 줄었다. 돈 꾸러 다닐 정도는 아니더라도 조금 허리띠를 당기면서 살고 있다.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낫다는 위로를 하며 살지만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코로나 시국이다.

 

그러던 차에 이 시집을 만났다. 이왕 외로운 김에 이 시인과의 인연을 일방적으로 갖다 붙인다. 근 15년 만에 나온 시집이지만 예전에 시집으로 만난 적이 있는 시인이다. 크게 각인이 된 시인은 아니었어도 박남원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잊고 있던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갑다. 나는 왜 이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이 양반 참 외로운 사람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상처난 가슴을 붙들고 외로움을 달래는 문구가 시집 곳곳에 보인다.

 

 

*삶은 언제나 무리한 질주의 연속

달려도 내달려도 쉬 채워지지 않는 생의 허기.

지은 죄도 없고 희망도 없이

결국 이렇게 털 난 짐승처럼 쫓기고 마는

이 위험천만한 가속

 

*시/ 저 견고한 세상의 문을 열릴 줄을 모른다/ 일부

 

 

*해 질 무렵 산중 마을의 허기.

(.....)

세상 다 돌려보내고 나서 남은 허기와

그 위에 들어선 아슬아슬한 평화.

 

*시/ 겨울 수기리에서/ 일부

 

 

*이 황량한 들판에 언제나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갔지만

애써 붙들고 있던 가지 끝에서 마침내 손을 털고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 같은

그 한순간의 평화,

허전하고 아슬아슬한 그런 평화의 위안 하나쯤으로

우리는 지금껏 내내 살아오지 않았던가.

 

*시/ 그렇게 아슬하게/ 일부

 

 

지나온 내 생이 늘 아슬아슬했기 때문일까. 나는 이런 싯구에 오래 눈길이 간다. 시인에게 생의 허기와 한순간의 아슬아슬한 평화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때론 절망적이면서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시집을 이렇게 결론 내린다. 쓸데없는 장식과 허세를 걷어낸 시, 그래서 더 울림이 있는 시집이다.

 

 

*봄날 한때 복사꽃잎이 붙들고 있던 가지 끝에서 떨어지기 시작해서 지상에 닿는 것만큼의 그 짧은 흩날림의 시간, 또 그 시간만큼의 못다 한 이야기거나 어쩌면 그 시간 안에 잠깐 부르다 만 짤막한 노래 소절 같은.

 

*시/ 나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끝 구절

 

 

이 시를 반복해서 읽으며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짧은 탄식을 한다. "어쩌다 이제야 오셨소?" 손바닥으로 표지를 쓰다듬으며 오래 읽고 싶은 시집이다. 그런 내 마음을 대신해주는 추천사가 시집 뒷표지에 실렸다. 이 시인을 마음에 담았으니 이제는 내가 시인의 바지랑대가 되어줄 차례다.

 

*가문 날 야윈 땅에 구절초가 아프게 연둣빛을 회임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봄날 꽃처럼 가뭇없이 지워진 옛시를 그리워하였으련만 잊혀지는 것이 오히려 흉복인 시절 그 시가 그날 조용히 찾아오신 것이다. 화엄이 화염이었던 노여운 연대기를 함께 썼던 그 사람 나의 옛시 남원이었다. *홍일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