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여우 - 육근상 시집

마루안 2021. 9. 30. 22:35

 

 

 

육근상 시집은 제목부터 간결하다. 이전부터 그랬다. 이번이 네 번째 시집인데 <절창, 2013년>. <만개, 2016년>, <우술 필담, 2018년> 등 모든 제목이 간결하다. 시집 이름도 한자를 병기하지 않으면 금방 이해가 되지 않을 제목이기도 하다.

 

요즘 시집 제목이 대체적으로 길고 달달해지는 경향이 있다. 제목 장사를 무시 못할 일도 아니나 일단 설탕과 색소를 듬뿍 넣고 보는 것이다. 코로나로 심신이 지쳤는데 시집이라도 달달하면 좋지 않냐고? 한편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때일수록 노래는 슬프고, 영화는 가슴을 후벼 파고, 시는 시고 떫어서 눈이 뻐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행복한 사람이 많은데 나라도 조금 불행하면 그것도 일종의 역설적 위안 아닐까.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삐딱한 아웃사이더는 어쩔 수 없다.

 

육근상 시인은 진국 같은 시를 쓴다. 시집 제목인 여우도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짐승이기도 하다. 영어에 심하게 오염되고 있는 우리말에서 여우도 조만간 폭스로 표기할 것이다. 사실이 팩트로, 위험이 리스크가 되고 전설이 레전드가 되었듯 훗날 한글은 영어를 적는 표기 문자로 전락할 것이다.

 

 

*정월은 여우 출몰 잦은 달이라서 깊게 가라앉아 있다
저녁 참지 못한 대숲이 꼬리 흔들며 언덕 넘어가자
컹컹 개 짖는 소리 담장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런 날 새벽에는 여우가 마당 한 바퀴 돌고
털갈이하듯 몸 털어 장독대 모여들기 시작하지
배가 나와 걱정인 장독은 옹기종기 숨만 쉬고 있었을지 몰라
여우는 골똘하게 새벽 기다리다
고욤나무 가지에도 신발 가지런한 댓돌에도
고리짝 두 개 서 있는 대청까지 들어와
바람을 토굴처럼 열어 세상 엿보고 있다

나는 칼바람 몰아치는 정월이면
문풍지 우는 소리 견디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럴 때마다 화진포에서 왔다는 노파가 간자미회 버무려주는 집에서
며칠이고 머물다 돌아오곤 하였다

 

*시/ 여우/ 앞부문

 

 

정월, 대숲, 담장, 마당, 장독대, 옹기, 고욤나무, 댓돌, 고리짝, 대청, 문풍지,, 스마트폰 시대에 이런 단어와 생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입에 올리기만 해도 꼰대나 시대에 뒤쳐진 구린 사람으로 치부된다. 요즘 표현으로 올드하다고 하던가.

 

시인은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오는 철 지난 짐승을 데려와 아주 따뜻하면서 울림이 긴 시로 표현했다. 육근상의 시가 빛나는 것이 이 지점이다. 아파트가 대세인 서식지에서는 주부들까지 오직 집값 오름이나 주식 시세, 가상화폐 등락이 주 관심사다.

 

단추 하나 누르면 20층까지 단숨에 데려다 주고 한겨울에도 집안에서 반팔을 입고 사는 사람에게는 대숲에서 불어오는 정월 칼바람에 흔들리는 문풍지 소리는 말 그대로 전설의 고향 이야기다. 이런 시는 나처럼 꼰대로 사는 올드한 사람이나 공감이 가는 걸까.

 

 

*따끈하게 데워진 방바닥 목침 끌어다 천장 바라보며

외롭게 떠도는 내 서러운 사정이나 문학이라는 쓸쓸함이나

웃고 떠들던 벗들 생각에 골똘하다 소반처럼 네모난 쪽창 향해 모로 누우면

비바람 쓸고 간 마당 켠 갯무꽃이 위로라도 하는 듯 몸 바르르 턴다

 

*시/ 해남 윤씨네 골방에 누워/ 일부

 

 

*어제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계곡 물소리 들으며 한나절 보냈네

사람이 사람을 피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구렁에서 내려온 침엽의 바람이 말 건넸네만 적막 소리 듣기 좋아 바라만 보고 있었네

혼자 사는 즐거움에 밥 먹는 것도 잊고 이틀 굶었네

처마 끝 매달아 놓아 꾸덕꾸덕해진 고등어 한 손 잡아

말린 고사리랑 넣고 화롯불 올려놓으려다 문밖 나섰네

 

*시/ 혼자 사는 즐거움/ 앞부문

 

 

읽을수록 마음이 맑아지는 시편들이다. 육근상은 2013년 첫 시집 <절창>을 낸 이후 뒤늦게 시에 바람이 들어 부지런히 시집을 내고 있다. 이번에 나온 시집 포함, 한결같이 출판사 솔에서만 시집을 낸 것도 인상적이다.

 

*육근상은 대학 입시의 실패와 수몰로 인한 외로움, 소외감에서 벗어나고자 어죽과 소주로 건달 생활을 하며 대청호 주변을 떠돌 때 삶의 애착을 갖는 한국 전쟁 실향민 거주지인 천개동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시와 첫 인연을 맺었다.

 

첫 시집 소개에 나오는 이 구절에서 시인의 성품을 읽을 수 있다. 자주 읽어야 더 입에 붙는 시, 판소리 명인의 곰삭은 소리처럼, 어느 무당의 징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듯 잠복된 슬픔과 애틋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