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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면 보이는 것들 - 의료인류학연구회

마루안 2021. 9. 19. 21:41

 

 

 

한 달 전부터 올 추석은 아무데도 가지 않고 집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코로나로 꼼짝을 하지 못한 작년 추석과 마찬가지다. 확진자 숫자가 작년보다 훨씬 많은데도 피부로 느끼는 경각심은 되레 느슨해졌다.

 

걸리고 안 걸리고는 하늘의 뜻이니 대충 살지 웬 호들갑이냐고 할지 모르나 그래도 안 걸리기 위해서는 가능한 접촉을 줄이는 것이 최상이다. 일찌감치 책을 읽으며 집에 머물기로 결정한 이유다. 이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 목록에서 몇 권의 시집과 단행본이 쏟아져 나온다.

 

몽땅 주문하고 싶으나 그래도 골라내야 한다. <아프면 보이는 것들>, 오늘 종일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이 연휴에 맞는 편안한 휴식을 본래 내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뺏은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 더 먹으면 누군가는 굶어야 하고 내가 하나 더 버리면 누군가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아프면 보이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건강 체질로 태어나서 최근 몇 년 동안 병원에 가본 적 없는 몸이다. 워낙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해선지 2017년 이후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래도 건강은 언제든 한번에 훅 갈 수 있기에 늘 겸손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절실하게 깨닫는다. 이 책은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지은이가 열세 명이나 된다. 출판사 후마니타스가 좋은 책을 많이 내는 곳인데 유독 이 책은 의도가 좋은 책이다.

 

아파야 보이는 것이 병원 풍경이지만 안 아파도 함께 공감하면 좋은 일이다. 병 명도 참 가지가지다. 못 고치는 병이라는 산후풍, 가습기 살균제 피해, HIV 감염, 유전으로 인한 희귀난치성 질환 등이다. 

 

이밖에도 말기암으로 치료가 무의미한데도 연명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환자와 가족의 고통과 장기 요양 병원에서 일하는 조선족 간병사들의 일상 세계는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공감도 직접 당해야만 보일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명절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맛을 느끼는 것도 내가 건강할 때 일이다.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고 스스로 숟가락질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먹는 것도 일종의 고통이다. 모든 음식이 쓴맛일 텐데 음식이 아닌 무슨 사료 먹는 기분 아닐까.

 

아직까지 내 신체에서 외부 도움을 받아야 하는 기관은 노안으로 인한 돋보기뿐이다. 늙으면 하나 둘씩 도움 받을 기기가 늘어난다. 지팡이를 짚다 보행기가 필요할 것이고, 인공관절을 넣을 수도, 틀니를 해야 할 수도, 누군가는 보청기를 껴야 할 때가 온다. 

 

끔찍하지만 남이 먹여주는 밥을 받아 먹으며 대소변까지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말란 법이 없다. 건강할 때 작은 것에 만족하며 남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것, 이 책을 읽으며 더욱 겸손해진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