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래 만진 슬픔 - 이문재

마루안 2021. 9. 19. 21:23

 

 

오래 만진 슬픔 - 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달의 백서 1 - 이문재

-그래서 달은 둥글어진다

 

 

지금 저기

저 높은 곳에서

얼마나 많은 눈빛이

만나고 있는 것인가

 

지금 여기

얼마나 많은 꿈이

얼마나 많은 안부가 안타까움이

저 달을 향하고 있는가

 

지금 한밤인 곳곳은

저마다 밤의 한가운데

지금 하늘 밝은 곳을 올려다보는

곳곳의 한밤의 중심은

저마다 얼마나 어두운 곳인가

 

얼마나 많은 어두운 곳에서

얼마나 많은 오래된 기도가

저 달을 향해 올라가는 것인가

 

지상의 아픈 마음들 다 받아내는

저 달은 그래서 둥글어지는 것인가

그래서 저토록 둥글고 밝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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